「과월호가 되어 버린 남자」/ 한용국/ 《시작》2004년 여름호
과월호가 되어 버린 남자
어떤 페이지도 중력을 견디지 못했다
어두운 날들에도 일련번호가 있는지
느닷없이 그는 밑줄 그어졌다
휙휙 날아와 꽂히는 저녁 어스름
책갈피인양 어느 페이지에
자신을 끼워 넣어 보기도 하지만
너무 쉽게 흘러내린다 어떤 조심도
소용없었다 그는 납작해졌다
창문들마다 썩은 잎을 매달고 있다
문지르면 쓱 지워질 것 같다
낡은 표지의 초상화들과
썩은 잎의 무늬들은 닮아 있다
그는 페이지를 넘기며
무심코 뱉은 회한들을 들여다본다
언제 끼워 넣은 이파리일까 잎맥들이
활자들을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다
가난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
뒷모습을 인화하던 거울이 움푹 패여 있다
어느 페이지에서 그는 몸을 던진 것일까
오래된 서가에 일련번호로 눕혀졌던 날들이
흐린 명조체로 어둠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감상]
과월호로 쓸쓸히 잊혀지는 시들을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단 한 번 빛에 펼쳐져 읽혀진 후, 영영 어둑한 페이지로 묻혔을지 모릅니다. 이 시는 그런 느낌을 남자로 비유해 풀어낸 것이 독특합니다. 결국 어느 페이지에 몸을 던져 납작한 종이 관짝에 눕혀지리란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 시에게 생명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시의 항변 '가난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 내내 눈에 남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