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정지한 낮 - 박상수

2006.04.05 16:56

윤성택 조회 수:1763 추천:238

《후르츠 캔디 버스》 / 박상수/ 《시작》시인선


        정지한 낮

        문득 시간을 잊고
        낮은 고요히 정지해 있네

        건물은 부드럽게 탄성을 잃어가네
        나는 미성년의 얼굴로
        과거로부터 길어 올리는 물기 없는 기억을
        낯설게 매만져 보네
        상념이 피워 올리는 무용한 잎사귀들
        언제나 혼자서 텅 빈 열차를 타네
        완전한 명상이 철로를 따라 이어질수록
        인간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지네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지 못하고
        모래바람이 불어와 부서진 석상 위를 덮어갈 때

        나는 낯선 역에 내리네
        의지 없는 몽환
        몽환이 둥글게 빚어버리는 모서리를
        비로소 인간의 형상을,
        떠난 사람들이 동물의 형상으로
        백사장 위를 굳어갈 때
        무릎을 꿇고
        모래를 씹으며 바람을 거스를 때

        낮은 고요히 정지해 있네

        나는 온통 하얀 낮달의 정령에 휩싸여
        침묵이 피워 올리는 여름 나무 밑에 앉아 있네
        이름 모를 열매에서 즙은 새어나오며
        눈먼 자의 시간이 대기로 번져가네
        


[감상]
시간은 삶을 지배하며 모든 물리를 공식 안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몸은 <시간>에 속박된 채 인과에 얽혀 한정된 장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시는 한낮을 정지시킴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나>와 <인간>의 정체성을 목격합니다. 지상에서 인간이 모두 사라지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석상>만이 모래 속에 묻혀버렸을 때 허망한 적막 같은 것. 그것 또한 <낯선 역>의 풍경일 뿐이어서, 레일처럼 뻗어 있는 시간의 축을 따라 문명의 생성과 소멸이 간이역처럼 스쳐갈 것입니다. 인간은 다시 동물에서 우상을 만들며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는 방법을 생각하겠지요. 마치 <여름 나무 밑> 장자의 꿈처럼 말입니다. 분방한 상상력의 스케일로 안내되는 색다른 여행을 다녀온 기분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31 살가죽구두 - 손택수 2004.04.19 1069 176
1030 여주인공 - 이희중 2002.02.16 1070 173
1029 찰나의 화석 - 윤병무 [1] 2002.11.13 1070 168
1028 다비식 - 신용목 2002.09.13 1071 219
1027 폭설 - 박이화 2003.01.08 1072 172
1026 정류하다 - 조동범 2003.10.24 1072 170
1025 스피드 사랑법 - 안차애 2002.11.01 1073 185
1024 가스관 묻힌 사거리 - 최승철 2002.07.02 1075 186
1023 오래된 약 - 백인덕 2003.08.26 1075 166
1022 정비공장 장미꽃 - 엄재국 2004.11.01 1075 183
1021 그곳 - 이상국 2002.11.27 1076 216
1020 거미의 길은 젖어 있다 - 김승원 [1] 2002.12.11 1076 197
1019 싸움하는 사람을 보다 - 박진성 2002.11.21 1077 178
1018 밤의 편의점 - 권지숙 2011.01.20 1077 99
1017 배꼽 - 이민하 2002.12.02 1078 191
1016 고가도로 아래 - 김언 2003.07.09 1079 221
1015 오래된 가구 - 마경덕 2003.03.10 1080 200
1014 과월호가 되어 버린 남자 - 한용국 2004.06.21 1080 188
1013 서치라이트 - 김현서 [2] 2007.03.13 1080 168
1012 건조대 - 최리을 2002.03.25 1081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