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연애에 대하여 - 이성복

2002.02.01 11:47

윤성택 조회 수:1639 추천:184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이성복 / 문학과지성사



         연애에 대하여




        1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넘어간다 손이 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싼다 숨막혀 죽겠어! 이불 위에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생각 하는 길을 껴안는다


        2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잡고 입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시신屍身을 밝히는 촛불들
        애인愛人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3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감상]
구경만 하자고, 함께 외출 나온 말년 병장들은 용주골 입구로 들어섰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군모를 벗어 허리띠 안쪽에 꽉 끼워두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작은 골목으로 이어진 길에는 넓은 유리창들이 젊은 군인들의 눈빛을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흐드러지게 웃던 여자가 다른 무리의 군모를 빼앗아 안으로 들어가자, 군인이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온통 기도의 형식으로 만난 애인들이었습니다……詩 속의 애인은 밤 사이 양말을 빨아 놓고, 군복 건빵주머니에 초콜릿과 사탕을 두둑이 넣어 두고 "감긴 눈, 긴 속눈썹"으로 잠들었을지도 모르는 일.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971 꽃기름주유소 - 고경숙 2007.02.23 1660 168
970 눈길, 늪 - 이갑노 2006.03.29 1659 248
969 곶감 - 문신 2006.04.12 1658 212
968 가문동 편지 - 정군칠 2006.02.02 1657 229
967 종이호랑이 - 박지웅 2006.04.10 1656 226
966 네 사소한 이름을 부르고 싶다 - 박소원 [1] 2005.01.18 1656 215
965 가물거리는 그 흰빛 - 이근일 2006.06.05 1653 261
964 쓸쓸한 날에 - 강윤후 2001.08.23 1651 211
963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장석주 2001.06.28 1649 325
962 맡겨둔 것이 많다 - 정진규 2004.03.03 1648 223
961 나방 - 송기흥 2005.08.25 1645 205
960 안녕, 치킨 - 이명윤 [2] 2008.02.04 1643 130
959 예감 - 류인서 2005.03.25 1643 205
958 나무 - 안도현 [1] 2003.03.15 1643 163
957 따뜻한 슬픔 - 홍성란 2001.11.27 1641 190
956 교통사고 - 김기택 [4] 2005.06.14 1640 221
955 객관적인 달 - 박일만 [3] 2005.10.25 1639 222
» 연애에 대하여 - 이성복 2002.02.01 1639 184
953 사십대 - 고정희 2011.02.22 1638 125
952 아내의 재봉틀 - 김신용 [1] 2006.05.05 1636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