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맡겨둔 것이 많다 - 정진규

2004.03.03 22:58

윤성택 조회 수:1648 추천:223

「맡겨둔 것이 많다」/ 정진규/ 《시작》 2004년 봄호


맡겨둔 것이 많다

  세탁소에 맡겨 두고 찾지 못한 옷들이 꽤 여러 벌 된다  잊고 있다가 분실하
고 말았다  스스로 떠나기도 했다  지금은 누구 몸을 입히고 열심히 낡아가고
있을까  내 길이 아닌 남의 길 어디쯤을  어떻게 천연덕스럽게 나다니고 있을
까  그것들 말고도 내게는 맡겨둔 것이 많다  몇 해 전 일본 가고시마 공항 보
관소에 맡겨 두고 온 라면집 여자의 눈물도 있다  맡겨둔 것이 많다 지지난해
엔 내 아버지마저 하늘나라에 맡겨 드렸다  어머니는 훨씬 오래 전 30년이 넘
었다  나는 어느 것도 버리지 못한 채 유보의 짐을 지고 기다리라고 기다리라
고 늑장을 부리고 있다 내 삶의 후반부가 더욱 더디다 꼬리가 길다 오늘도 기
다리다 지쳐  삼삼오오 스스로 길 떠나고 있는 뒷등들  아득히  바라보면서도
나는 그런다


[감상]
세탁소로, 여행으로, 부모님으로, 그리고 다시 화자에게로 이 시는 ‘맡겨둔 것’에 대한 사유가 펼쳐집니다. 잔잔하게 넘나드는 소재의 운용은 말 그대로 노익장입니다. 누구나 한번쯤 있음직한 세탁소에 맡겨둔 옷, 비닐에 싸인 채 하얀 코팅 철사를 입고 어깨에 먼지를 훈장처럼 매단 옷은 또 얼마나 될까요. 한때 나의 전부였던 것을 맡겨둔다고 믿는 것… 보통 시 그 자체에서 감동이 전해지기도 하지만 이처럼 그것과 동시에 지난 일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시도 있는가 봅니다. 언젠가 걸레가 되어버린 내 옷이 바닥의 눈물을 훔치는 꿈을 꾸었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971 꽃기름주유소 - 고경숙 2007.02.23 1660 168
970 눈길, 늪 - 이갑노 2006.03.29 1659 248
969 곶감 - 문신 2006.04.12 1658 212
968 가문동 편지 - 정군칠 2006.02.02 1657 229
967 종이호랑이 - 박지웅 2006.04.10 1656 226
966 네 사소한 이름을 부르고 싶다 - 박소원 [1] 2005.01.18 1656 215
965 가물거리는 그 흰빛 - 이근일 2006.06.05 1653 261
964 쓸쓸한 날에 - 강윤후 2001.08.23 1651 211
963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장석주 2001.06.28 1649 325
» 맡겨둔 것이 많다 - 정진규 2004.03.03 1648 223
961 나방 - 송기흥 2005.08.25 1645 205
960 안녕, 치킨 - 이명윤 [2] 2008.02.04 1643 130
959 예감 - 류인서 2005.03.25 1643 205
958 나무 - 안도현 [1] 2003.03.15 1643 163
957 따뜻한 슬픔 - 홍성란 2001.11.27 1641 190
956 교통사고 - 김기택 [4] 2005.06.14 1640 221
955 객관적인 달 - 박일만 [3] 2005.10.25 1639 222
954 연애에 대하여 - 이성복 2002.02.01 1639 184
953 사십대 - 고정희 2011.02.22 1638 125
952 아내의 재봉틀 - 김신용 [1] 2006.05.05 1636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