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 / 안시아/ 《시안》2004년 가을호 계간 리뷰 좋은시 中
정류장
귀 밑 머릿결처럼 비가 내린다
시골 정류장 처마 밑
쪽진 머리 노파 몇이 쪼그려 앉아 있다
굽은 허리, 처진 가슴
하얗게 새고도 여전히 조금씩
시간을 밀어내고 있을 머리칼,
굴곡진 세월이 은비녀에 가로질러 있다
좀처럼 펴지기 힘든 것은 시름뿐이 아니다
남은 生같은 차편을 기다리는 노파들
표정마다 둥근 웃음이 패여 있다
노인 몇이 더 처마 밑에 씨감자처럼 모인다
옹이같이 불거진 무릎에 손아귀를
포개며 이야기 싹을 낸다
세월은 저 빗줄기처럼 공중에
가장 빠른 길을 내며 지나왔다
환한 불빛을 앞세운 완행버스가
어둠을 가로질러 들어온다
노파의 은비녀가 봇짐 쪽으로 기운다
사선의 빗줄기가 점점
굵은 결을 늘어뜨리고 있는 승강장,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려는 듯
노인들 하나 둘 차 앞문을 힘겹게 오른다
[감상]
비 오는 버스정류장에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노인들을 섬세한 묘사와 더불어,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버스’에 담아내는 직관이 좋은 시입니다. ‘씨감자’에서 ‘이야기 싹’까지 가는 비유의 힘은 사물과 언어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낸 빼어난 표현으로 읽히는군요. 흑백 단편영화를 보듯 비 오는 시골버스 정류장 잔잔한 풍경이 오래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