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어> / 주병율/ 《시작》 시인선, 《시향》 2006년 봄호 中
빙어
달밤이었다.
화톳불이 타고 있었다.
겨울 무덤 주위에선 가랑잎 한 장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검게 숯이 되고
세상의 모든 시간들이 당나귀처럼 어둔 산맥을 넘어갔다.
얼음이 벤 돌들이 오래도록 강물 속에서 흐느껴 울었다.
어디선가 쩔렁거리며 자꾸만 요령소리가 들렸다.
사람 하나 없이 저문 산맥을 넘어 시간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었다.
아직 한 번도 가닿지 못했던 시간의 뼈
그 냉기의 뼈를 바르며 빙어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
그들은 여름내 건너지 못한 언 강물을 거스르며
자신들의 생애에 대해, 시간에 대해, 죽음에 대해 골똘해져 있었다.
더는 외롭지 않을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한 방울의 눈물로 밤을 지새기도 했다.
세상 어디서나 꽃은 피고 꽃은 졌다.
달밤이었다.
강물 속에선 자꾸만 요령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데 한 무더기의 억새가 흔들리고 있었다.*
가는 빙어의 옆구리가 물살에 흔들릴 때마다
달빛은 얼음 속에서 하얗게 깊어갔다.
* 김춘수 「뭉크의 두 폭의 그림」중에서
[감상]
달빛이 은은한 언 강물 속에서 수없이 자맥질하는 뜬 눈의 빙어들, 그 풍경에 데려다주는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지리산 어느 강가에 와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귀와 눈을 트이게 하는 얼음에 베인 돌들이 내는 강물소리, 냉기의 뼈 같은 빙어… 가보지 못한 곳일지라도 상상이 먼저 감각해 냅니다. 특히 <세상의 모든 시간들이 당나귀처럼 어둔 산맥을 넘어갔다>라는 살아 있는 서정에 흠뻑 반하게 되는군요. <달밤>과 <요령소리>의 매혹적인 반복도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겠고요. 달빛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깊어지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