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 문성해/ 《창비시인선》(근간)
푸른 방
풋완두콩 껍질 속에
다섯 개의 완두콩 방이 푸르다
완두콩을 훑노라니
껍질과 콩이 초록의 탯줄들로 연결되어 있는 게 보인다
작은 놈에서 큰놈까지 한 놈이라도 놓칠세라
껍질은 탯줄을 뻗쳐 악착같이 붙잡고 있다
밭 너머가 저수지라서였을까
엄마는 나와 동생을 나무에 묶어두었었다
해질 때까지 밭에서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고 계시던 엄마
나와 동생이 조금만 안 보여도 허겁지겁 쫓아오셨다
딴 데 가면 안된다 여기 있어야 한다
엄마가 퉁퉁 불은 젖을 동생에게 물리러 올 때까지
동생과 나는 전지전능한 줄의 반경 아래서 놀았다
엄마가 훌쳐놓은 그 줄을 타고 개미들이 내려오기도 하고
탱탱하게 당겨지면 줄은 짧게 비명을 지르기도 하였다
엄마 젖퉁이에 푸르딩딩하게 뻗친 힘줄을
동생이 빨아먹는 거라고
그래서 동생의 똥이 푸르다고 생각하던 그때
하늘 전체가 푸른 방이었다
나무도 너럭바위도 저수지도 모두 초록의 탯줄로 땅에 매달려
우리들처럼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던 그때
세상은 막 물오른 완두콩 속처럼 안전하였다
푸르른 콩깍지 속에서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완두콩들
방이 깨지고 탯줄이 끊어지는 순간,
몇놈이 훌쩍 어디론가 내빼고 만다
억지로 떼어낸 젖꼭지 같은 탯줄에서
연녹색 젖이 묻어난다
[감상]
세상과의 불편한 관계 속에서 시를 쓰는 시인들의 시를 많이 봅니다. 물론 타락한 시대의 포즈와 영합하지 않으려는 강한 부정정신이 관념적 진보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성해 시인의 시편에서는 서정으로 빚어진 <믿음>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믿고 싶어집니다. 유년의 회상과 맞물려 <풋완두콩>, <나와 동생을 나무에 묶어두었>던 줄과 <탯줄>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푸른 방>의 의미가 잔잔하게 다가옵니다. 이를테면 <푸른 방>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꿈을 일깨워주는 유토피아입니다. 그의 시편들에는 이렇듯 세상에 대한 믿음 방식이 있습니다. 저항과 부정의 형식을 넘어선 실체에 대한 믿음, 이 자체가 치열함이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