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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2004.01.05 18:51

윤성택 조회 수:2050 추천:195




■ 동아일보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김성규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기,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具)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부장품과 함께
바닥의 얼룩과 물을 끌어다 쓴 흔적을 설명하려
삽을 든 인부들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방을 널빤지로 막은 동굴에서
앞니 빠진 그릇처럼
햇볕을 받으며 웃고 있는 가족들
기자들이 인화해놓은 사진 속에서
들소와 나무와 강이 새겨진 동굴 속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사내는 짐승을 쫓아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으리라
굶주린 새끼를 남겨놓고
온몸의 상처가 사내를 삼킬 때까지
지쳐 동굴로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축 늘어진 젖가슴을 만져보고 빨아보다
동그랗게 눈을 뜬 아기
퍼렇게 변색된 아기의 입술은
사냥용 독화살을 잘못 다루었으리라
입에서 기어 나오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 한국일보


유적-----예현연


금간 항아리 사이로 그녀와 내가 교차한다
비어있는 것들을 배경으로 그녀는 흐릿하다
선사(先史)보다 아득하게 먼지낀 세월이
두터운 유리벽으로 앞을 가로막는다
고대(古代)의 여인이 회갈색 미라로 누워있다
유폐된 황녀의 마지막은 고통뿐이었다
벌린 입 속 수천년을 견딘 치아들이 온통 틀어졌다
푸른 비소 알갱이 갈앉은 자기병이 그녀의 유품이다
벽옥 파편들은 멸망한 족속의 文字처럼 어지럽다
지하 전시관에서 부식되는 황녀의 초상
흩어진 채색, 이제는 밑그림만 남았다
낯선 유적에서 마주치는 그녀와 나의 낡은 눈동자
저 자기병에 맺힌 유약은 수천년 전부터 글썽여온 울음이다
그녀도 엇갈리는 인록(因綠) 속에서 때론 그 실오라기를
애써 끊으며 살았을 것이다 붉게 힘준 잇바디
고리 끊어진 장신구는 한때 그녀의 저녁을 치장했다
가슴팍에다 사그락대던 벽옥 구슬들은
한순간 쉽게 끊어져 내렸다
멀리까지 굴러가는 구슬을 멍하니 보고 있는 그녀
그러모아도 쥐어지지 않는 것들을
놓아버린 순간이 유적(遺跡)의 저녁이다 불이 꺼진다
폐관을 알리는 안내 방송만이 어지럽고
출구를 가리키는 비상등은 꺼져버린다
어둠 속에서 모든 금간 유물들이 무너져 내린다


■ 문화일보


시월의 잠수함-----김지훈


구름이 입술 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 어디쯤일까. 지닌 것 없이
숲만 가득 담아둔 나무 그늘에 앉아
기어이 가져온 새 책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작은 물줄기 속에서도 잘 돌아가는 스크루
사방 가득한 수억 촉(燭)의 소리가 큰 닻이 되어
산봉우리들이 신들의 전함으로 불리었던 그 바다 위에 박혀 있다
밤낮이 한꺼번에 몰아오는 내연기관의 큰 울림
그 안에는 칼 대신 나뭇잎 들고 싸우던 날도 있다
힘줄 선명한 잎 하나가 공기를 잘게 저미며 내려온다
신들은 어디에서 배를 만드는 중일까
베어낸 나무 밑동에 그려진 선명한 음파탐지기 자국
나는 녹슨 쇠를 털며 가라앉고 있는 배들의 그림자를 본다
나뭇잎을 칼처럼 쥐고 싸우던 시절
앙상해진 주물기계들이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
바람이 떠미는 결이 물 속인 줄 알고
낙엽이 벗었다가 도로 신는 잠수화를 본다
아직도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신들의 칼을 나는 나뭇잎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다
이 배를 붙들며 한 자리에서 먼바다를 돌아오는 사계절
내 고함으로 한 방의 어뢰를 뭉쳐
사령관의 함교가 있는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갑판이 낙엽을 털 듯 몸을 털며 다시금 방향을 잡고 나아갈 때
수리공들이 큰배를 향해 떼지어 몰려가는 항로를 따라
푸른 위장을 한 잠수함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 경향신문


가스통이 사는 동네-----안성호


  빈집의 풍경을 텔레비전이 우주로 송출한다.  텔레비전 위로 유리컵이 있고
그 속에서 감자가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나무가 되었다. 유리컵 속에서 감자는
죽고 감자만한 유리컵이 나무에 열렸다.  그 유리컵마다 바다가 출렁인다. 푸
른 바다를 가르며 달력 속으로 노란 수상스키 한 대가 사라진다. 손을 흔들어
대는 벌거벗은 남녀의 벗어 놓은 옷이 달력 곁, 행거에 걸려 있다.  여자의 빨

간 치마를 남자의 양복 上衣가 껴안고 있다. 벗어 놓은 양말이 화장실로 걸어
가고 화장실에 놓인 세탁기에선 양복 下衣가 길거리에서 묻혀온 노래를 쿨렁
거린다 똑똑, 세일즈맨이 빈집에 노크를 하고 돌아선다. 똑똑, 물탱크에 물소
리가 들린다. 수압은 낮고 지붕은 점점 무거워진다.

노란 물탱크와 가스통이
퇴락한 집 모퉁이를 돌아오는 빛을 베고 지붕에 누워 하늘을 본다.
오백 마리의 양
구백 마리의 흰 오리가
줄을 지어
하늘을 걸어간다.


■ 세계일보


작은손-----문 신


1
정말로 한번 만져보고 싶게 작은 손이었다

2
싸락눈이 내리는 저녁
우리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즐거웠다
누군가의 농담에 모두들 과장된 표정으로 웃어주었고
그것만이 우리의 저녁을 아름답게 장식한다고 생각했다
문득,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축축한 것들이
우리들의 배경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어떤 이는 전화를 하러 눈치껏 자리를 뜨고
그 옆자리의 친구는 화장실에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빈자리의 쓸쓸함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처럼
문이 열릴 때마다 눈길을 돌리곤 했다
그때마다 낯선 얼굴을 만나고는 서둘러
쓰디쓴 눈물빛 술잔을 비웠다
갑자기 세상이 시큰둥하게 보이는 저녁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쌓아놓은 빈 병들을 보며
가끔씩 던지곤 하던 농담도 시들해져갈 무렵
창 밖으로 함박눈이 내렸다
우리들은 다시 활기를 띠며 눈에 얽힌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것이 사랑이든, 낭만이든,
아니면 진부한 자유이든,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즐거웠으며
즐거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조바심 나는 저녁이었으므로

또 한 친구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우리들은 감추어두었던 속내를 더욱 단단하게 여미며
썩 괜찮은 농담을 찾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침몰하기 직전의 선장처럼 우리는
어떤 결정이라도 단호하게 내려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창 밖의 함박눈은 우리들을 비껴서 내렸다
서너 걸음 앞에 놓인 영정 사진 한 장으로
우리들은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었으므로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빈 병들은 쓰러졌고 아직은
채워지지 않은 잔들이 우리들 앞에 남아 있었고
감당하기 벅찬 날들은
더 이상 우리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날이었다

3
남자의 손을 보았다
지하보도에 엎드려 있는 남자의 손은 작았다
제 목숨조차 스스로 거두지 못한 친구의 손처럼, 세상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제것으로 움켜쥘 수 없을 만큼 작은 손
그 작은 손 위에 놓여진 동전 개수만큼 침침한 저녁이었다


■ 전북일보


풍경(風磬)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문신



때가 되면 풍경 끝에 매달린 물고기나 되어
허공에 헛된 꿈이나 솔솔 풀어놓고
나 하루종일 게을러도 좋을 거야
더벅머리 바람이 살살 옆구리를 간지럽혀도
숫처녀마냥 시침 뚝 떼고 돌아앉는 거야
젊은 스님의 염불 소리를 자장가 삼아
한낮에는 부처님 무릎에서 은근슬쩍 코를 골고
저녁 어스름을 틈타 마을로 내려가서는
식은 밥 한 덩이 물 말아 훌러덩 먹고 와야지
오다가 저문 모퉁이 어디쯤
차를 받쳐놓고 시시덕거리는 연인들의 턱 밑에서
가만히 창문도 톡톡 두들겨보고
화들짝 놀라는 그들을 향해
마른 풀잎처럼 낄낄 웃어보아도 좋을 거야
가끔은 비를 맞기도 하고, 비가 그치면
우물쭈물 기어 나온 두꺼비 몇 마리 앉혀놓고
귀동냥으로 얻은 부처님 말씀이나 전해 볼거야
어느 날은 번개도 치고 바람이 모질게도 불어오겠지
그런 날은 핑계 삼아 한 사나흘 오롯이 앓아 누워도 좋을 거야
맥없이 앓다가 별이 뜨면
별들 사이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칠 거야
그런 날이면 밤하늘도 소란스러워지겠지
그렇게 삶의 변두리를 배회하다가 내 몸에 꽃이 피면
푸른 동꽃[銅花]이 검버섯처럼 피어오르면
나 가까운 고물상으로나 팔려가도 좋을 거야
주인의 눈을 피해
낡은 창고에 처박혀 적당한 놋그릇 하나 골라
정부(情婦) 삼아 늙어가는 거지
세월이야 오기도 하고 또 가기도 하겠지
늘그막에 팔려간 여염집 처마 끝에 매달려
허튼 소리나 끌끌 풀어놓다가
가물가물 정신을 놓기도 하겠지
그런 연후에 모든 부질없는 것들을
내 안에 파문처럼 켜켜이 쌓아놓고
어느 하루 날을 잡아 바람의 꽁무니에 몸을 묻어도 좋을 거야


■ 대구매일


조용한 가족-----이동호


무상 임대 아파트 8층 복도,
한 덩이 어둠을 치우고 걸어 들어간다.
복도가 골목 같다.
이 골목은 일체의 벗어남을 허용하지 않는다.
복도가 직장이기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도를 벗어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이곳에서 사표를 낸다는 것은
극빈(極貧)의 뜻이고,
담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일층으로라는 의미를 지닌다.
저승은 주로 일층에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고층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시 죽음과 내통하는 셈이다.
작년, 두 사람이 일층으로 순간 이동했다.
올해는 벌써 두 명분의 숟가락이
고층에서 주인을 퍼다버렸다.
몇 사람 더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으니
한 두 집 더 빈 공간이 늘어날 것이다.
밤하늘은 눈치가 빠르다.
미리 조등(弔燈)을 내걸었다.
사람들은 아파트 속에 조의금처럼 들어앉아 있다.
일부는 여전히 복도를 서성이다가
아무런 말없이 일층을 내려다보곤 한다.
이곳에서는 침묵도 하나의 宗派가 된다.
사람들은 침묵을 광신도들처럼
따른다.


■ 부산일보


눈물길-----김춘남


기가 막혔다. 눈물길이 막혔으니….

길은 어디에나 있다고 하더라만,
미처 몰랐다.
눈물에게도 길이 필요한 줄은 정말 몰랐다.
무심코 사는 것도 바빠서
세례만 받고 교회에 안 나가는 신자처럼
눈물의 존재를 잊고 산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곰팡내 나는 일기장을 들추어보니,
'눈물은 나의 신앙'이라는 얼룩진 표현도 눈에 띈다.
가뭄에 메말라버린 골짜기의 저수지처럼
가슴 속 밑바닥의 뻘이 드러나면, 그 속은
흉물스러운 쓰레기들이 방치되어 있을 테지.
이마며 가슴에 환경보호 띠를 두르고
환경 지킴이로 동분서주
개발이냐,환경이냐를 역설하였는데….
건조주의보의 나이에 들면서
먼 곳의 우포늪은 잘 보여도 정말 가까운
눈물샘은 돌보지 않았다.
고도근시와 난시를 동반한 마른 가슴은
어이없게도 눈물길을 막아버렸다.
물론 수술만 하면 간단히 끝날 일이지만,
마음이 담수되지 않고서는
길이 있어도
눈물은 결코 가지 않으리라.
눈물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수몰된 고향과 같은 것.
인생의 이정표에 없는 눈물샘으로 가는 길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좁은 길
잡초에 묻혀 있던 고향 가는 길에 눈물길은 있으리.


■ 조선일보


폐타이어-----김종현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그가 속도의 덫에서 풀려나던 날
온몸이 닳도록 달려온 일생을 위로하듯
바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잠시 뒤의 어떤 바람은 풀씨랑 꽃씨를
데리고 와서 놀아주었다
벌레들의 따뜻한 집이 되었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노란 달맞이꽃은 왕관처럼 환히 피어 있다


■ 국제신문


4월-----최미경


벚꽃이 전쟁처럼 흩날리는 저녁
바그다드 도서관이 불에 탄다
길 위에 사람들은
낡은 책 안으로 사라져가고
죽음은,

검은 주머니 가득
모래 폭풍을 싣는다
어둠을 달리던 바람의 마차들
달빛아래 드러나는 폐허의 이빨들
희망도
절망도
깨진 꽃잎을 주워 담으며 중얼거린다

…봄은,
학살이다

홀쭉해진 계절을 틈타
별빛도 마른 티그리스 강가
어린 소녀들의 물동이 안에서도
달은 자라고
포탄이 떨어진 자리마다
흰 꽃이 선다


■ 대한매일


토우-----권혁제


평택 삼 리(三 里)에 비가 내렸다
저탄더미 속에 들어간 빗물이
검은 까치독사로 기어 나왔다
석탄재 날린 진흙길 따라
드러누운 경부선 철길
나녀(裸女)가 흘린 헤픈 웃음 위로
금속성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기차가 얼굴 붉히며 지나갔다
한 평 쪽방의 몇 푼 어치 사랑에
쓸쓸함만 더해주는 기적(汽笛)소리
누이의 교성(嬌聲)이 흘러 다니는 삼 리(三 里)
누이의 꿈은 거기에 있었다
밤마다 사랑 없는 사랑이
하늘로 가는 문턱을 움켜 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축축한 신음소리만 되돌아 오는
갈 길 먼 꿈들은, 역광장(驛廣場)에 쏟아져 나와
가슴 뚫린 퍼런 그림자로 떠돌아 다녔다
갈 수 없는 가난한 어머니의 품을 찾아서
무뚝뚝한 하행선 열차가 떠나가고
반 시간쯤 후에 비가 내렸다
부활의 율동으로 옷을 벗는 누이,
삼 리(三 里)에 내리는 비릿한 토우(土雨)


■ 무등일보


이방인의 뜰 바다는 멀다-----임해원


어둑 새벽
바다의 낙조가 억새들 꺾인 무릎에 얹힌다
풀씨 같은 초저녁별을 품은 거기
눈이 부셨으나
바닷가에 사는 시인은 늘 바다가 부족하다
바다가 멀리 달아났기에
하늘을 허물어 그리로 흘려 보낸다
새떼들이 날갯짓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시간은 소멸 쪽으로 다가가고
사랑이라는 것조차
무너지는 허당을 어찌하지 못한다

떠나보내야 할 사람들 발을 묶은 섬의 한 끝씩
몸에 갇혀있던 어둠은 물음표를 세운다
주지 않았음에도 받아버린 상처 때문인가
물 위에 뜬 얼굴
괄호에 갇혀 뭉개진다
젊음의 거의를 소진하고도
설명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는 건
참 다행이다

말없음이 살가워지는 만큼만 세상을 이해하겠다며
어쩌다 늦게 피어난 흰 꽃에 어둠이 앉아
뜰 가득 바다가 출렁이는
하늘은 마침 밀물 때였다.


■ 광주일보


집에 관한 단상-----김효순


1. 거미

날개는 없지만
공중에 떠 있다
보금자리는 아니지만
늘 집을 짓는다
입으로 눈으로
집을 짓는다

희고 투명한 기억들만을
허공 중에 매달아
기다림의 긴 터널을 뚫는다
길 없는 길을 잇고 또 이어 만든
하얗게 반짝이는 미로 속의 집

집은 두 팔을 벌리고
집은 아가리를 벌리고
집은 두 눈을 부릅뜨고
숨죽여 찾아 올 손님을 기다린다

공중에 뜬 채
힘없고 나약한 짐승만을
기다리는 집
집은 늘 위태롭다
집은 덧없는 덫,
덫이다 아니
무덤이다

2. 나방

날개는 있지만
늘 주저앉고야 만다
다 그놈의 불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녀석에게 뛰어
들었다가
한쪽 날개의 끝을 데었다

그날 이후
악몽만이 남았다
더 이상
제대로된 비행 따윈 할 수 없다.
기울어진 날개
지치고 아파서
아무런 말조차 할 수 없다.

한때
사랑이 집이라고 믿었다
이제 누군가를 기다리지 못한다
나만의 동굴을 찾아
지친 날개를 퍼덕일 뿐

멀리 어슴프레 하얀 집이 보인다
이번엔 집이 확실하다
그 집에게 안긴다
그 집에게 속삭인다
너만이 내 영원한 안식이라고
너만이 내 맨 처음 자궁이라고

3. 달팽이

날개도 없고 다리도 없지만
있는 힘껏 바닥을 기어다닌다
내 슬픔은
너무 오래...
딱딱하게 굳어져 옹이가 되었다

이젠 그 슬픔들이
눈과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집이 되었다

그는
파도소리를 듣고
어느날 찾아왔다
그는
소용돌이가 두렵다며
어느날 떠났다

지문처럼
나이테처럼
언제나 걸어온 길들을
둥글게 말아
짊어지고 다닌다

내 집은
작은 섬

이젠 그 오랜
노독(路毒)과 그리움이
더듬이보다 단단하게
앞길을
짚.어.준.다.


■ 강원일보


살림의 입----신유아


이사하기 삼일 전 미리 빈집을 둘러보았다
물은 잘 나오는지 보일러는 잘 돌아가는지
일행과 나누는 소리가 벽에 퉁겨 되돌아 왔다
이사를 하고 살림의 자리를 정해주고 소리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살림들이 소리를 먹고 있었다
집들이 손님의 왁자한 소리를 먹고
소리 몇 개는 아래층으로 흘러 경고를 듣기도 했다
살림들이란 주인의 소리를 삼키며 둥글어지는가
어떤 밤이면 내 말이 맞다며 딱, 무릎 치는 낡은 장롱
어릴 때는 이 소리가 무서워 어머니 가슴팍을 파고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어머니 무릎에서도 이 소리가 났다
어머니 쓰시던 문갑에 등을 대고 잠들면
겨울날 옷 속에서 훅 솟구치는 살내 같은 것이
이마를 가만히 짚어 오기도 하고
살림의 틈서리, 수천의 입으로 삼킨 소리는 어디로 간 것인가
30년 후 내 딸아이의 이마를 짚고 있는 것인가
구들장처럼 식지 않는 몸의 온기
나이기 이전의 생부터 천천히 데워 온
어머니의 장작같은 손바닥을 찾아 간 것인가
새 집에서 쉽게 잠들지 못하고
20년전의 어머니와 10년후 딸아이
지금은 세상에 없는 두 사람을 생각한다
잠득 척 가만히 오래 묵은 살림의 그림자
길게 목을 빼고 내 가슴에 귀를 대고 있는 줄도 모르고.


■ 대한신문


雨中, 해인사 가는 길-----윤미진


하늘은 며칠째 심사가 편치 않은가
길 나서는 내게 무슨 말 있는 듯
손등을 슬쩍 치거나 바지가랑이 적시며
어제의 안부를 묻는다
우산 위로 온몸 던져
알 수 없는 교향곡을 연주하는 빗방울들
키 낮은 구정초들 고개 푹 꺾고
빗줄기에게 집요한 추궁 당하고 있다
종복처럼 뒤따르던 길이
저만치 앞서가다가 자꾸 돌아보고
산허리 가볍게 휘감고 있는 비안개는
마실 가는 여인의 뒷모습처럼 한가롭다
괜히 따라 나섰다 싶은지, 빗방울들은
내가 가는 길의 끝이 어디인지 묻기도 한다
몇 구비 돌아 들면
풀들과 벌레소리 자라나는 내 마음에도
너와 맞닿을 작은 길 하나 열리게 될까
낡은 우의로 가리고 있는 중년의 굽은 등,
그 갈라진 목소리만 분주하고 아직 안 팔린
삶은 옥수수들이 낯빛을 마주보며 웅크리고 있다
들짐승의 표효같은 홍류동 계곡 물줄기,
제 가는 곳 어딘지도 모르는 채
되돌아올 길을 왜 재촉하고 있는지
바에 집 지은 졸참나무 한 그루 허리 굽혀
물살에 손 담그려 버둥대도
계곡은 눈치채지 못한다
어디선가 내려다 보고 있을 것만 같은
내 마음의 절간 하나
먹장구름 걷히면서 느릿느릿 제 모습을 드러낸다



■ 광주매일


달빛 밟기-----고영심


바람이나 쐬겠다고 잠깐 나선 저녁
한낮을 바스락대던 나뭇잎 속에서
쓰르라미 한 마리가 귀를 당긴다
너른 길이 끝나는 약수터를 지나
몇 개의 무덤을 지나
구부러진 산의 내장 환히 열어 놓고
무연한 달,
저 혼자 물이 올라있다
휘모리로 감기는 바람 데불고
소나무 사이로 걸어나갈 때 그래,
저 달과 통정한들 죄 되랴 싶은 것이지
거추장스런 외투 벗어 허리에 묶고
부드러운 능선을 타는 것이지
나무와 나무 사이 거미줄에 엉기면서
도토리 한 알에도 미끄러지면서
우거진 터널 헤치고 오르고 올라
꼭대기서 숨이 딱! 멎는 것이지
혈관이 터지도록 조여드는 달의 감촉
신열을 앓듯 젖은 옷자락 끌고
내리막길에 이르렀다
바람이나 쐬겠다고 잠깐 나선 저녁
쓰르라미 울음소리 멎지 않던 저녁
내 무한의 발자국 소리 들으며


■ 경남신문


풍향계가 있는 오후-----남화정  


 아이들을 하교시킨 학교 혼자 풍향계를 돌린다 빨갛고 하얀 네개
의 숟가락이  바람을 퍼 먹으며 잘도 돈다 먹성으로 치면야 담장 너
머 까치들만 하리 감홍시 진즉  다 털어먹고서 양푼  만한 알전구에
들러붙어 퍼벅 입이 터지는  뜨거운 밥숟가락질의 새들,  너흰 알는
지 다산(多産)의 복 하나는 타고났던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굴
뚝 아득히 탯줄 묻어 지킨 고향 재 되어 풀풀 흩날릴 위기를

 이곳은 채소 하나, 나무 한 그루 맘대로 캘 수 없는 택지개발시범
지구, 초겨울 볕을 등마다 지고 아, 모포처럼 비닐을 펴 유골을 줍던
사내들 어떻게 되었을까 풍향계 너머 기와집들 감나무들, 아직은 파
헤쳐지지 않는 들녘과 학교만이 유적이 되어 떠도는,  해체된 숲 속
에서 붉게 살갗이 패인 산들이 피를 쏟고 있다 잘가라 새여 나무여
낼 아침도 재재거리며 교문 들어설 삼천 아우들 위해 풍향계, 바람
한 하늘 남겨두는 것 잊지 않는다


■ 대전일보


그의 침대----오병훈


그의 침대에는 한 마리의 악어가 산다
한 번 물리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보일 만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불은 검은 늪 위에 떠있는 아름다운 분홍 수련이다 이불 밑에는 거대한
앨리게이터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천천히 유영을 하고 있다
악어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영원한 포로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는 악어를 숭배한다 매일 밤 그는 악어에게 자신의 먹음직스런 살점과 하얀 뼈를
제물로 바친다 악어가 그의 살점을 뜯을수록 의식은 점점 혼미해진다
그가 불면증에서 벗어난 것도 악어의 덕분이다 지난 장마 폭풍우가 몰아치던
여름밤 꿈에서 그는 처음으로 악어를 만났다
5년 간의 실직이 그를 한 병 반의 소주 없이는 잠들 수 없게 만들었고 그런 그에게
악어는 구세주 같은 존재이다
악어는 조금씩 조금씩 그의 살점을 뜯어먹는다 하지만 고통은 잠시뿐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그의 정신은 혼미해지고 그는 이내 아득하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언젠가 악어는 그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탐할지 모른다
비내리는 검은 밤 그는 지금도 악어를 만나기 위해 검은 늪 위에 몸을 누인 채
분홍 수련 이불을 덮고 있다


■ 농민신문


빈 말뚝-----이여명


  고삐를 당겼다 팽팽하게 공중에 줄을 치며 외줄로 잡아 당겼다 말뚝은
말뚝대로 소는 소대로 잡아 당겼다 소가 한 번 잡아당기면 말뚝도 한 번
잡아 당겼다 소힘만큼 말뚝에게도 힘이 있었다 소가 바깥으로 끌어당기
면 말뚝은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쪽에서 놓으면 저쪽에서도 놓았다 서로
모르게 끌어당길 수는 없었다

  검게 박힌 말뚝으로부터 소는 달아날 수 없었다  말뚝도 한 발  움직일
수 없었다 서너 발 거리에서 말뚝은 소를 소는 말뚝을 바라보았다  말뚝
없으면 소없고 소 없으면 말뚝 없었다  이 말뚝에 소뿔대기를 오래 비빈
적 있었을 것이다  그때 말뚝도 제 뿔때기를 소뿔때기에 비벼댔을  것이
다 소가 스스로  고삐를 맬 수 없듯 말뚝도 스스로 땅을  뚫지 못했다 말
뚝이 땅에 박혀있지 않으면  말뚝이 아니듯 혼자 박힌 말뚝은 말뚝이 아
니다


■ 불교신문


대흥사 가는 길-----임곤택


숲에서 나온 길이 나를 앞질러
동백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뼈를 묻을 곳을 찾는 늙은 동물처럼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쉼이 없었다
저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산 그림자와 함께 산을 넘은 바람은 숲에 머물고
알 수 없는
사실 조금은 알 듯도 한 무엇을 보았던지
상기된 꽃잎들이 연이어 숲을 나오고
나를 보더니 흠칫 놀라며 총총히 길을 건넜다
나무들이 울부짖듯 노래를 부르고
위태롭게 펄떡이던 잎들 위로
오랫동안 공중을 떠돌았을 시퍼런 영혼들이
막 새 몸을 얻어 힘겹게 반짝이고 있었다
모든 것은 명백해 보였다
동백숲으로 사라진 길은 돌아 보지 않았고
동백꽃만 검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 충청일보


모래시계-----정진헌


잊혀진 네 기억들을
반복의 손짓으로
미련 없이 돌려놓지 마라
텅 빈 가슴 하나
채우기 위해 나는

하나의 가슴을 버려야만 했다
이제 버려진 시간의 간이역에
너희들이 남겨놓은 것은
야윈 허리뿐,
기억해 주지 않을
되돌릴 수 없는 줄 알면서도
가슴을

비워주던 내가 아니었더냐



■ 전북중앙


카르만볼텍스-----신주희



한번도 쉼표를 찍어보지 못한 한 해가 다음 문장으로 줄행랑 치는 겨울,
거리에는 움츠린 사람들이 캐럴을 밟고 튀어 오를 듯 걷고 있다
팔뚝에 전선을 친친 감은 불꽃나무 열매들 잘 익은 과즙을 뿜어낸다
언 손을 비비며 포장을 친 트럭으로 들어서면 안경알로
달려드는 성엣장 어디를 가도 뚜렷하게 맞아주는 풍경이 없다
몸이 뚫린 오뎅꼬치를 입에 물고 속이 든든한 고기만두를 기다리다 앗! 찜통에 손등을 덴다
벌겋게 익은 살갗이 아려오고 입 속에 터진 만두를 쑤셔 넣다가 찔끔 나오는 눈물 어린 날,
나보다 더 어린 넷째 고모 딸아이를 업고 놀다
뜨거운 다리미 위로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발등이 찍혀 크게 부풀은 아이는 울다
잠이 들고 할머니에게 싸리비로 얻어터지면서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여섯 살 무렵 서울에서 실종된 아이,
고모는 눈물줄기 전단지 신상정보에 ‘오른쪽 발등에 둥그렇게 데인 흉터가 있음’ 이라고 썼다
이제 스물이 될 아이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밤늦도록 상처는 소용돌이쳤다
이불 속에서 너붓거리고 바라본 몸 곳곳에 누군가 지근지근 밟고 간 자국들이 널려있다
흉터들이 클수록 나의 신상정보도 뚜렷해진다
밤새도록 물집 속을 들락거리는 아이,
아침이면 고치처럼 둥그렇게 부푼 물의 집이 터진 마침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카르만볼텍스 : 어떤 방해물에 의해 공기가 소용돌이치는 현상


■ 한라일보


십일월의 진눈깨비-----양인숙


  그 날, 아버지가 세워놓은 지게가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돌담 밖으로
무너져 내리던 오십년지기  박토의 일생이 희망과 절망이 반쯤 절은  진눈깨비
로 흩뿌려졌다. 모두들 떠나버린 시골마을 어귀에  순박한 하늘 한복판을 들여
놓으며 넘어진 아버지의 빈 지게 위로 소나기도 함박눈도 되지 못한 회색 구름
이 총총 걸린다. 당뇨병으로 수척해진 아버지의 말년, 날마다 야위어가던 퀭한
얼굴에 십일월의 시린 날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보라빛 상념이 달개비 꽃으
로 피어나고 가끔씩 뱉어놓은 무서리에 놀라 고개를 떨군다. 무릎 저린 십일월
의 진눈깨비 가슴마다  설움 깊어도 당뇨병 치료에 특효약인 달개비꽃  탕관에
달여지면 돌밭 사이로  하얀 씨앗들이 한숨을 묻고 있다. 중국산 수입 약초  향
기에 밀려서 제 값 받지 못한 채 등 굽어 마르던 아버지의 잔기침소리.  희망과
절망의 반쯤  절은 십일월의 진눈깨비가 아버지 허리춤에서  겨울의 마지막 기
운을 모아 힘찬 기지개를 켠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31 공터의 행복 - 권정일 [2] 2006.01.19 2085 254
1130 그림자 - 안시아 2005.06.13 2081 212
1129 아무도 오지 않는 오후 - 고영 [2] 2009.05.07 2076 117
1128 12월 - 강성은 [3] 2005.10.26 2073 240
1127 겨울 그림자 - 임동윤 [2] 2005.12.07 2070 224
1126 나비의 터널 - 이상인 [1] 2006.07.27 2064 241
1125 네온사인 - 송승환 [1] 2007.08.07 2063 126
1124 빨간 우편함 - 김규린 2011.04.05 2061 149
1123 가슴 에이는 날이 있다 - 백미아 2008.10.17 2056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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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 청춘 - 이윤훈 [1] 2008.03.27 2049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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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넝쿨장미 - 신수현 [1] 2001.04.07 2043 332
1118 나무의 내력(來歷) - 박남희 [2] 2001.04.04 2040 291
1117 축제 - 이영식 [3] 2006.07.11 2034 247
1116 나에게 기대올 때 - 고영민 [2] 2005.09.26 2034 218
1115 어떤 그리움을 타고 너에게로 갈까 - 김경진 2001.10.19 2026 202
1114 빛의 모퉁이에서 - 김소연 2006.02.15 2024 228
1113 목련 - 김경주 [1] 2006.05.03 2017 214
1112 2007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3] 2007.01.04 2016 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