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빛의 모퉁이에서 - 김소연

2006.02.15 13:32

윤성택 조회 수:2024 추천:228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 김소연/  민음사(2006)


        빛의 모퉁이에서


        어김없이 황혼녘이면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

        이따금 나는 무지막지한 덩치가 되고
        이따금 나는 여러 갈래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의 충고를 따르자면
        너무 빛 쪽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불빛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茶山)은 국화 그림자를 완성하는 취미가 있었다지만
        내 그림자는 나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다

        커다란 건물 아래에 서 있을 때
        그는 작별도 않고 사라진다

        내가 짓는 표정에 그는 무관심하다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에 그는 관심이 있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지금은 길을 걷는 중이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감상]
추상은 실체의 정확한 파악에서 비롯됩니다. 이 시는 <그림자>에 대한 시각적인 관찰에서 상상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림자의 현존이 쓸쓸한 그늘로 체감되는 건,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이라는 의인화에 진정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관념과 말로 운용되는 시는 추상에 기울어져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제대로 된 추상이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분명한 건 발견이 의식을 확장시킨다는 점입니다.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았던 그 영역에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는 진실이 꿰뚫고 갑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31 공터의 행복 - 권정일 [2] 2006.01.19 2085 254
1130 그림자 - 안시아 2005.06.13 2081 212
1129 아무도 오지 않는 오후 - 고영 [2] 2009.05.07 2076 117
1128 12월 - 강성은 [3] 2005.10.26 2073 240
1127 겨울 그림자 - 임동윤 [2] 2005.12.07 2070 224
1126 나비의 터널 - 이상인 [1] 2006.07.27 2064 241
1125 네온사인 - 송승환 [1] 2007.08.07 2063 126
1124 빨간 우편함 - 김규린 2011.04.05 2061 149
1123 가슴 에이는 날이 있다 - 백미아 2008.10.17 2056 123
1122 2004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1] 2004.01.05 2050 195
1121 청춘 - 이윤훈 [1] 2008.03.27 2049 184
1120 섬 - 조영민 [6] 2001.08.07 2047 256
1119 넝쿨장미 - 신수현 [1] 2001.04.07 2043 332
1118 나무의 내력(來歷) - 박남희 [2] 2001.04.04 2040 291
1117 축제 - 이영식 [3] 2006.07.11 2034 247
1116 나에게 기대올 때 - 고영민 [2] 2005.09.26 2034 218
1115 어떤 그리움을 타고 너에게로 갈까 - 김경진 2001.10.19 2026 202
» 빛의 모퉁이에서 - 김소연 2006.02.15 2024 228
1113 목련 - 김경주 [1] 2006.05.03 2017 214
1112 2007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3] 2007.01.04 2016 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