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 김영미 / 98년 《시와사상》등단, 웹월간 詩 [젊은시인들] 그리움에 맞서다 中
빗소리
토닥토닥 고분을 캐는 소리
늑골을 파는 소리
흙을 떨궈 내고 빗방울 모양의 곡옥(曲玉)을 가려
머리에 귀에 팔에 온몸이 찰랑이는 빗방울 여자를 거느리고
박물관 지나 토성(土城)을 지나 힌두사원 너머 몽골고원 그 남자 청
동빛 부푼 근육을 지나, 북아프리카 그 여자 검은 유두를 지나 지구가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 멀리 주술사가 두드리는 여음의 북소리를 따
라
밤 내내 걸어가는 신라적 처녀를 따라 그녀가 채우는 놋쇠요강의
질긴 가락을 따라, 백제마을을 지나 백수광부를 부르는 여옥의 노래
소리를 따라, 열두 줄 빗줄기로 두드리는 고구려적 그 여자 분첩소리
를 따라, 여덟 구멍 강물로 이어지는 피리의 궁음(宮音)을 따라 흐르
고 흘러 여기 내 몸속으로
토닥토닥 고분을 파는 소리
내 몸을 캐는 소리
고생대적부터 나의 그리움이
잠인 듯 꿈인 듯 무덤인 듯
오, 봉분처럼 둥근 그대 늑골 속으로
[감상]
봄비 소리 따라 펼쳐지는 상상력의 스케일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시입니다. 빗방울이 땅에 부딪쳐 내는 소리, 과거 어느 순간에도 같은 빗소리를 내었겠지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 역사가 있기 이전, 비는 여전히 내렸을 것이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자리할 것입니다. 그래서 땅 속에 묻힌 어느 유골에게도 빗소리는 꿈과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빗소리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섬뜩한 ‘그리움’으로 젖어들게 하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