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고경숙/ 《문학산책》2005년 봄호
모자
내 생일에 즈음해 어머니
털실 가게 다녀왔다
내 머리통을 신문지에 본뜨고
날마다 조금씩 키우기 위해
어머니 실타래를 당길 때마다
함지박 안에서 나는 탯줄을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돋보기 편안하게 조는 밤
반만 완성된 모자 속으로 자꾸 기억을 들이밀면
라면발처럼 엉킨 어머니의 헌 실은
오빠의 스웨터에서 언니의 조끼로
잘도 둔갑했다
선술집 색시 간드러지는 노랫소리
깊은 밤 삼켜버린 아버지를 기다리며
몇 번이나 삶을 짜다 풀었는지
아랫목에 앉아 끝없이 털실을 감는
어머니 온 몸이 구불구불하다
오늘도 그 밤처럼 외풍 심한데
어멈 생일이 며칠 남았누?
어른거리는 손가락에 자꾸 헛 바늘을 꽂으며
오빠 것도 언니 것도 아닌 온전한 내 모자를 낳느라
함지박 속에서 어머니와 내가
데굴데굴 구른다
[감상]
어머니의 뜨개질에서 가족에게 연결된 정이 느껴집니다. 원래 뜨개질은 집중력과 인내심이 가장 중요한데, 어머니는 <선술집 색시 간드러지는 노랫소리>에 취한 아버지에서 가끔씩 흔들렸나봅니다. 그러나 틀린 자리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것이 뜨개질이듯, 가족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인생 한 벌로 짜 남기셨습니다. 털실을 <탯줄>로 보는 시선이 이 시의 백미이어서 마지막 두 행의 생동감이 깊이를 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