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불지르다》/ 유영금/ 《문학세계사》시인선
희망에게
믿지 않는다
네게로부터 버림받았음을
기억하지도 않겠다
나를 놓아 버리던 너의 잔인한 눈빛을
그러나 환장할 것 같은 하늘이 있어
그 하늘 아래서
네 손아귀에 휘둘리던 머리채를 눕히고
너를 기다리겠다
오지 않아도 좋아, 기다리기만 하겠다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유죄라면
무기수라도 괜찮아
구메밥 사발이나 핥다
떠나간 너로부터 서서히 살해되겠다
[감상]
‘시인은 영혼의 화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는 시인의 정신작용에 의한 명암과 농담으로 그 색채가 수놓아집니다. 이 시의 강렬함과 비장함은 시집 속 ‘시인의 말’에서 그 연유를 알 수 있습니다. 교통사고와 사람에 대한 배신, 고통으로 얼룩진 그 시간들을 견뎌낸 것은 다름 아닌 끈질긴 스스로의 의지입니다. 이 시에서 <희망>은 그렇게 간단히 오지 않습니다. <희망>은 스스로를 낮추고 낮춰 가장 아픈 절망에서 소생되기 때문입니다. 냉소와 공포, 연민은 비극의 실체까지 꿰뚫는 진정성이 이룩해놓은 시인만의 코드인 셈입니다.
* 구메밥 : [명사] 예전에, 옥에 갇힌 죄수에게 벽 구멍으로 몰래 들여보내던 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