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바다는 아직 살아 있다/ 박현주 (시산맥 회원)/ 국민카드 문학상 동상작품(2002)
그의 바다는 아직 살아 있다
아파트 후문 입구, 작업복을 입은 한 사내가 반원진을 펼치고 있다. 연탄 화덕 위
국자를 올리고 하얀 설탕을 넣었다가 이어 소다를 넣고 나무 젓가락으로 젓는다.
부르르 끓어오르며 옅은 갈색이 되자 기름칠한 철판에다 설탕물을 붓고 납작하게
눌러 크고 작은 몇 개의 범선을 찍어낸다. 그의 눈엔 갑자기 생기가 돌고 조무래기
몇몇이 구부린 그의 옆에 모여든다. 그 중 한 아이가 범선 한 척을 골라 침을 묻힌
바늘 끝으로 찍힌 선 따라 돛을 살살 떼어 낸다. 철판에는 햇살을 받은 파도가 밀
려오고 출항을 기다리는 하얀 돛이 부풀어오른다. 숨을 죽인 아이들의 푸른 유선
형의 등 사이로 갈매기 떼가 푸드득 날아오르고 순간 한쪽의 돛에 툭 금이 간다.
에이 재수야, 손을 털고 일어서서 아이들은 놀이터 쪽으로 달려가고 사내는 이내
동전 통에 누워 있는 백동전과 함께 오수에 빠진다. 바다가 달아난 사내의 생은 저
녁 무렵 구멍 숭숭 뚫린 허연 연탄재 두 장으로 길가에 남겨진다.
[감상]
바다를 발견해내는 상상력이 좋습니다. 한때 바다에서 등 푸른 생선을 잡았을 그가, 이제 아이들의 백동전을 받으며 범선모양의 '달고나'를 만든다는 것. 아마도 그의 바다가 살아 있다는 내적 희망을 보여준 거겠지요. 하지만 그 내력에는 어떤 작위도 포함되지 않는 쓸쓸한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연탄재 두 장'은 다름 아닌 현실의 징표이며, 그가 꿈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연료가 됩니다. 호들갑스런 포즈 없이 건조한 일상을 소묘해내는 솜씨가 참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