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도로 아래」 / 김언 / 『현대문학』2003년 7월호
고가도로 아래
오래 길을 걷다 보면 머리 위에도 길이 보일 때가 있다. 몇 년을 하루
같이 걸어와서 올려다보던 길, 한동안 찾지 않은 이 길을 두고 사람들
이 고가도로라고 부르는 그 아래에 내가 있을 확률이 높다.
다르게는 산업도로라고 부르는 이 길을 따라 트럭들이 흘리고 가는
먼지알갱이가 내려앉는 그 아래에 서서 내가 있을 확률이 높다. 자욱
한 먼지와 희박한 공기가 만나서 먼저 가는 사람의 재채기를 받아주는
은행나무 옆에 내가 서 있을 확률이 높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정을 주고받고 타액을 주고받고 마지막에는
이별을 주고받는 무심한 거리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곳, 새끼 같은 먼
지가 태어나는 곳 한가운데 내가 서서 울고 있을 확률이 높다.
지상의 길과 하늘의 길이 어긋나는 곳에서 우리가 헤어지며 하는 말
가운데 가장 추악한 기억만 걸러서 듣는 나무, 은행나무 한 그루가 떡
버티고 서 있는 이 길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지금도 아름다운 때가 묻
어나는 한 사람의 집이 있을 확률이 높다. 돌아가서는 까맣게 묻은 사
랑을 두고두고 꺼내먹던 한 사람의 얼굴을 유난히 흰 이빨로만 기억하
는 내가 여기 서서 기대어 있을 확률이 높다.
머리 위에도 길이 다니고 지상에서도 너무 멀리 뻗어가버린 그 길가
에 서서 은행나무 한 그루, 흰 발목을 드러내며 웃고 있을 확률이 높다.
오래 전부터 갈라져온 그 길을 따라 밑동부터 잘려나간 나무들이 잊지
않고 서 있을 확률이 높다.
[감상]
'확률이 높다'는 서술을 끝까지 일관되게 사용하며 진술된 이 시는, 일어날 수 있는 확실성을 비껴감으로 상상력을 열어놓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고가도로'라는 도시문명의 부산물을 통해 한 개인이 겪는 생활사를 쓸쓸하게 잇대어 놓았다고 할까요. '확률이 높다'라는 말, 참 수학적인 말인데 감성의 측면에서 다시 쓰이게 되는 것을 보니 새삼 느낌이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