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정물」/ 김길나/ 『문학마당』2003년 가을호
움직이는 정물
꽃병이 탁자 위에 놓여 있으나
이 두 정물은 서로 상관하지 않는다
행당동 성당은 언덕 위에 있다
성당은 언덕의 가파른 경사와 무관하다
언덕길보다 낮은 지붕 아래서 생의 문 하나가
닫히는 소리, 길잠 자는 이가 낮술에 취한
화해하지 못한 과거와 현재가 고함치며 다투는
소리, 종일 불협화음은 언덕을 오르내린다
언덕은 불안한 음계다 그는 부서졌다
언덕을 밟는 발 밑은 파열음이다 그는 쪼개졌다
과거의 문이 열리고 이목구비 수려한 그가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걸어나온다
그리고 자신의 남루한 길잠 곁에 나란히 선다
해가 빠져나가 버린, 분리된 자아(自我)가 사이에
노을이 걸린다
달뜨는 밤마다 파괴되지 않는 추억이
언덕에서 내려오고 있다
[감상]
'언덕은 불안한 음계다'에서 오래 시선이 머뭅니다. 서로 상관하지 않는 두 자아에 대해, 세상은 항상 다른 이면을 보여줍니다. 한 번 보고 또 다시 찾아 읽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