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연두의 시제 - 김경주

2009.12.02 18:00

윤성택 조회 수:1087 추천:119

  《시차의 눈을 달랜다》 / 김경주 (2003년 『서울신문』로 등단) / 《민음의 시》160, 제28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

  연두의 시제

  마지막으로 그 방의 형광등 수명을 기록한다 아침에 늦게 일어난다는 건 손톱이 자라고 있다는 느낌과 동일한 거 저녁에 잠들 곳을 찾는다는 건 머리카락과 구름은 같은 성분이라는 거 처음 눈물이라는 것을 가졌을 때는 시제를 이해한다는 느낌 내가 지금껏 이해한 시제는 오한에 걸려 누워 있을 때마다 머리맡에 놓인 숲, 한 사람이 죽으면 태어날 것 같던 구름

  사람을 만나면 입술만을 기억하고 구름 색깔의 벌레를 모으던 소녀가 몰래 보여준 납작한 가슴과 가장 마지막에 보여주던 일기장 속의 화원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그곳에는 처음도 끝도 없는 위로를 위해 처음 본 사람이 필요했고 자신의 수명을 모르는 꽃들만 살아남았다

  오늘 중얼거리던 이방(異邦)은 내가 배운 적 없는 시제에서 피는 또 하나의 시제, 오늘 자신의 수명을 모르는 꽃은 내일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된다

  구름은 어느 쪽이건 죽은 자의 머리칼 냄새가 나고 중국 수정 속으로 들어간 곤충의 무심한 눈 같은 어느 날

  사람의 눈으로 들어온 시차가 구름의 수명을 위로한다

        
[감상]
추억의 어느 부분을 기억하려면 그 즈음의 여러 풍경을 거쳐야 합니다. 의식이 저장해놓은 데이터는 이처럼 파편적이면서 유기적으로 생을 엮어냅니다. 이 시는 ‘기억’ 속에 자리한 결정적인 순간들을 구조화시키는 데 탁월함이 돋보입니다. 마치 롤러코스터가 가라앉았다가 솟구쳤다가 다시 지상으로 내러섰을 때의 느낌. 문장의 의미를 쫓아 시인이 만들어 놓은 내면의 레일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덧 ‘연두’의 색감에 가닿습니다. ‘누구보다 농밀하게 모국어의 속살을 사랑하고 그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말하는, 그 향일성에 독자의 생각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91 프랑켄슈타인 - 김순선 2004.06.17 1088 174
» 연두의 시제 - 김경주 [1] 2009.12.02 1087 119
189 공중부양 - 박강우 2004.04.12 1087 225
188 처용암에서 1 - 김재홍 2003.09.24 1087 195
187 참붕어가 헤엄치는 골목 - 김윤희 2003.01.29 1087 196
186 브래지어를 풀고 - 김나영 2011.01.12 1086 78
185 선명한 유령 - 조영석 2004.11.15 1086 165
184 음암에서 서쪽 - 박주택 2002.09.24 1086 240
183 움직이는 정물 - 김길나 2003.09.26 1085 183
182 자유낙하운동 - 권주열 2003.12.20 1084 205
181 어도 여자 - 김윤배 2007.06.07 1083 138
180 건조대 - 최리을 2002.03.25 1081 180
179 서치라이트 - 김현서 [2] 2007.03.13 1080 168
178 과월호가 되어 버린 남자 - 한용국 2004.06.21 1080 188
177 오래된 가구 - 마경덕 2003.03.10 1080 200
176 고가도로 아래 - 김언 2003.07.09 1078 221
175 배꼽 - 이민하 2002.12.02 1078 191
174 밤의 편의점 - 권지숙 2011.01.20 1077 99
173 싸움하는 사람을 보다 - 박진성 2002.11.21 1077 178
172 거미의 길은 젖어 있다 - 김승원 [1] 2002.12.11 1076 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