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이상국/ 『문학사상』2002. 12월호
그곳
나무들도 엉덩이가 있다
새벽 숲에 가면 군데군데 쭈그리고 앉아
볼일 보는 나무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날 아침은 산이 향기로 가득하다
내 사는 설악산의 엉덩이는 얼마나 깊고 털이 무성한지
내 그것과는 감히 견줄 수가 없다
또 어떤 날은 미시령을 넘어가며
달도 엉덩이를 보일 때가 있는데
그 모습이 아름답고 섹시해서
나는 어둠 속에서 용두질을 할 때도 있다
모든 것들은 엉덩이가 있고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왔는데
하늘은 발 딛을 데가 없으므로
더러 구름이나 물새들을 보내거나
오줌 소나기로 강을 닦아놓고는
자신의 엉덩이를 비춰보고는 한다
[감상]
'엉덩이'에 대한 돋보이는 상상력입니다. 시가 이처럼 상상의 소산이지만 아슬아슬하게도 그것이 작위(作爲)와의 은밀한 거래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좋은 시와 만든 시, 그 사이를 하루에도 수없이 오가는 것이 시인의 천형(天刑)이 아닐까 싶네요. 적어도 이 시는 그곳을 헤쳐 나온 서정으로 여겨집니다. '어둠 속에서 용두질' 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