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가죽구두」/ 손택수/ 『현대시』 2004년 1월호
살가죽구두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부산역 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
맨발이 캉가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거리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그 누구도
벗겨 갈 수 없는
맞춤 구두 한 켤레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
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네
[감상]
맨발을 구두로 보는 시선이, 시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내다보는 시선이 이 시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는 글짓기 같은 묘사보다는, 상상력이나 발견에 더 시적 가치가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라는 좋은 발견이 내내 감동으로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