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 정병근/ 『시작』시인선 6
유년
측백나무 냄새를 맡았다
개미들이 하루종일 햇살을 끌고 갔다
매미 소리가 한낮의 귀청을 찢었다
바지랑대 높이 빨래가 펄럭였다
후두둑, 소나기가 오기 전에
서둘러 교미를 끝낸 암사마귀가
숫사마귀를 뜯어먹었다
단 한번의 정사를 위해
별들이 공중으로 전 생애를 던졌다
버둥거리며 뒤집힌 몸을 일으켜 세우고
쇠똥구리는 둥근 대지의 페달을
부지런히 밟았다 거미는 발을 헛디딘
잠자리의 체액을 거침없이 빨았다
나무와 풀은 함부로 웃자랐다
바위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강과 저수지는 자주 사람을 잡아먹었다
수억만 리 물길을 뚫고 연어 떼가 돌아왔다
멀리서 산은 팔짱을 낀 채
양떼구름을 지키고 있었다
하늘은 별 생각 없이
핏빛 노을을 풀어놓았다
[감상]
얼마나 무심해져야 이처럼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풍경을 적어낼 수 있을까요. 유년시절, 어쩌면 소리가 빠진 전쟁영화처럼 이렇게 지나왔는지도 모릅니다. 15년만의 첫 시집이라지요. 시집 곳곳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풍경들이 시선을 이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