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김충규/ 문학동네 (근간)
밤이면 저승의 문이 열린다
낮의 광휘를 쓸어모아 물을 끼얹어놓은
일몰이 잔물결처럼 잔잔하다 눈먼 벌레들이
그 속에 웅크려 가느다란 어둠을 배설하고 있다
어둠들이 그물처럼 이승을 포위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격렬하게 파닥거리던 이승이 이내 잠잠해진다
밤이 되면 저승의 문이 스르르 열려
그 속에 서성거리던 영혼들이 이승으로 산책을 나온다
낮에 고요해져 있다가 밤만 되면 슬프게 우는 나무가 있다면
` 그 나무 이미 저승 쪽으로 쓰러지고 있는 중이다
새들 중에도 훌쩍 저승 쪽으로 날아가는 새가 있다
밤만 되면 숨결이 격렬해지는 사람 있다면,
이미 그의 몸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둠이 출렁출렁 창궐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어둠이 숨결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니
잠자다가 저승의 문을 연 내 할머니가 그런 경우다
오래지 않아 죽을 자는 자신도 모르게
제 죽음을 주위에 암시해놓는다
그 암시는 어둠 속에서 더 예민해진다
[감상]
교보에 갔다가 반가운 시집이 있어 얼른 사고 말았습니다. 한 번 두 번 좋다 싶은 시를 읽은 기억이 있다면, 종로통 인파 속에서 단번에 친구의 뒤통수를 알아보듯 시집을 알아보기 마련입니다. 이 시는 초반부의 불빛에 뛰어드는 날벌레가 '어둠을 배설하고 있다'에서부터 '낮에 고요해져 있다가 밤만 되면 슬프게 우는 나무'는 '이미 저승 쪽으로 쓰러지고 있는 중'의 발상까지 시인만의 독특한 시선이 포진해 있습니다. 이렇듯 좋은 시는 상식적인 것을 태연하게 몰상식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것을 다시 일반적인 지식이나 판단력으로 이해하게끔 재배치합니다. 그 간극의 사이에 시인만의 '직관'이 존재하는 것이겠고요. 배울 것이 많은 시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