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번지」/ 이승원 / 『문학과사회』2003년 겨울호
126번지
한낮이 때묻어 거뭇해지면서 상한 개떼들이 몰려오는 언덕
계단에 선 채 취할 때 밤은 타국어로 소년을 호명한다
노란 허벅지가 선명해지고 풀려난 유인원이 빈 병을 흔들면
간판은 짧게 주정한다 거리의 주인은 저지대를 굽어보다
강을 잠시 짝사랑한다 병든 아침이 접근하기 전에
어두운 복도로 달아나고 싶은 엽서들
미친 새벽 기차는 속도를 사랑하는 법에 대해 함구하고
나른한 푸른빛이 배달부를 축복한다
[감상]
의미와 의미 사이 간극이 너무 커 참 아슬아슬한 시입니다. 그야말로 이 낯선 글자들의 조합을 서정으로 봐야하나, 하면서도 시의 매력은 도식화되고 뻔한 것들에 대한 대항이자 모색이라는 걸 다시금 생각합니다. 이미지 즉 분위기에서 오는 징후만으로도 시가 쓰여지고 이해될 수 있다는 확신이, 이 시를 탄탄한 긴장으로 내몰고 응축시킵니다. 어찌되었건 126번지가 한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