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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밖엔 수사가 있다 - 최치언

2002.05.20 13:51

윤성택 조회 수:1046 추천:209

수사 밖엔 수사가 있다/ 최치언/ 현대시 2월호




        수사 밖엔 수사가 있다



        13블럭 유아살해사건도 발생했다 실로폰을 치면
        맑은 비명이 튀어 올라오듯

        아이는 후미진 공터, 그것도 폐타이어 속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수
      사는 진행되었다
        많은 말들이 오고갔다, 결과에서 최초를 찾기란 어려웠다 말들은
        최후의 만찬처럼 조용하면서도 웅장하게
        거행되었다 그러나 식탁아래 그들의 발은 각자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것은 오직 말하지 않는 아이의 부모뿐이었다
        시간은 빠른 속도로 아이의 죽음을 부패시켰다 수사는
        죽은 아이를 위해 그 어떤 것도 해줄 수 없었다 단지 지독한 냄새 앞에
        코를 적당히 삐뚤어 잡고 바바리코트 깃만 세울 뿐이었다
        아이가 걸어간 하루동안의 흔적을 되밟아 올라갔다 그 흔적은
        전날로부터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수사는 뒷걸음치고 있었다
        뒤로 밟아간 길에는 짙은 안개와 여러 개의 강이 있었다 한 남자가
        빠르게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개의 기원과 강의 이름을 몰랐으므로 그곳에 들어가 그 누군가를
        미행하길 주저했다
        그렇게 수사는 아이의 죽음의 현장과는 상관없는 곳에서
        아이의 죽음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신발이 그 집 지붕 위
      에서
        발견되었다
        수사는 예측 가능한 성명서를 아이의 신발끈처럼 풀어놓기 시작했다
        풀어진 신발 끈,
        그러나 그것이 아이의 신발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자 아이의 부모는
        모든 수사를 불신하기 시작하였다
        이젠 수사는 살해된 아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 무수한 말들을 종합하
      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되었다 말들의 가능성을 하나씩 지워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다 지우자 아주 또렷한 한 가지
        말만 남았다
        아이는 폐타이어 뒤에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수사는 흡족했다
        그들은 공터에 모여 담배를 한 대씩 나누어 피며 잔뜩 찌푸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첫째, 아이는 확실히 죽었다
        둘째, 아이가 죽었으므로 유인한 증인은 사라졌다
        셋째, 우리들의 수사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아무 것도 발
     견하지 못했으므로 범인은 수사 밖에 있다
        넷째, 수사 밖에 있는 것은 수사의 대상이 아니므로 유아살해 사건은 이
     것으로 종료한다
        그들이 구둣발로 비벼 끈 노란 담뱃불이
        수사가 종료된 뒤에도 그 동네에서 사라지지 않고 혼자 타고 있었다
        안개와 강 건너 한 남자가 그들의 담뱃불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비벼껐다




[감상]
이런 주제로 이렇게 긴 시를 풀어내었다는 것에 놀랄 따름입니다. 미해결된 "유아 살해 사건"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시적인 성취로 재구성한 이 시는, 문장마다 이끄는 은유와 함께 긴장감이 있습니다. 달리 보면 시가 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어떤 방향성을 제시받은 것 같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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