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 심재휘/ 『문학세계사』제8회 <현대시 동인상> 수상 시집
폭설
밤에 편지를 쓰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겉봉에서 낡아갔다
회귀선 아래로 내려간 태양처럼
따뜻한 상징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내 거친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눈싸움을 하며 추억을 노래했으나
단단하게 뭉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설차가 지나온 길은 다시 눈에 덮이고
눈 먹은 신호등만 불길하게 깜박거렸다
바람이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였으므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였다 모두들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고 수상한 암호 만지듯
동전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어두운 창고에서 첫사랑을 생각해야 했다
언 손을 불며 자전거 바퀴를 고치다가
씀바귀며 여뀌며 쑥부쟁이를 몰래 생각하였다
[감상]
밖은 지금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가만히 내다보고 있으면 눈발도 마음이 있어 사선이 되었다가 직선이 되었다가 수시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날 편지를 생각하자니 왜 짠해지는 걸까요. 이 시는 마치 문학에도 주파수가 있다는 듯, 시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겉봉에서 낡아간 사람. 부치지 못할 사연의 이름일까요. 그 폭설의 과거가 지금 다시 이어지는 것이라면 나는 밤새 편지를 쓰겠습니다. 푸성귀 같았던 청춘,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