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피」 / 박판식/ 『시작』2003년 봄호
탈피
노인은 누워 있다 가족은 울거나 미쳤거나 쿵쾅쿵쾅 뛰어다니고 있다
노인의 골격은 다소 움츠러들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가 빠져나갔다
내 방은 병풍 뒤의 노인과 같은 방향이다
그렇다고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노인은 과거를
나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것을 보고 있다
누가 먼저 탈피할 것인가 내기를 한 것도 아닌데
나는 스물아홉이 넘었는데도 머리카락과 손톱이 삐죽삐죽 자라고
노인은 노쇠한 육체를 버렸다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백치가 되어버린 막 고아가 된 그의 사십 된 아들이
나비를 좇아 옥상의 화분 사이를 쿵쾅쿵쾅 날아다니고 있다
모두 각자 분주하다
[감상]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복잡다단한 삶을 딱히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한데 어우러진 수많은 경우의 수가 미래를 결정지을 것입니다. 이 시는 '가족'이 처한 상황을 제시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전지적 시선이 인상적입니다. 곳곳에 종교와 철학의 모티브를 이미지화 시킨 점이 흥미롭습니다. 모두 각자 분주하지만, 실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고단한 소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