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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時 체인점 앞에서 - 최을원

2003.03.12 15:14

윤성택 조회 수:1038 추천:172

「25時 체인점 앞에서」/ 최을원/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3년 3월호



         25時 체인점 앞에서
  


        창틀에 25時 체인점이 환하다
        새벽 2시를 막 넘은 시각,
        초록 불빛은 간판 속에, 나는
        글자키 사이 크레바스에 갇혀 있다
        은밀한 사이트에서 불륜의 꽃들이 피고 지고
        네트웤 사거리엔 중세의 하수구 냄새가 올라온다
        서류 가방을 옆구리에 낀 초로의 한 사내
        낡은 활자를 게우다 모니터 밖으로 쓰러진다
        두 발목이 창틀에 잘리자 건널목 신호등이
        무거운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2시 반,
        그들이 온다 정확히 열 두 대의 오토바이들,
        컵라면 하나씩 주유한 후 차례로 떠나 보낼 때
        종일 수신된 정체 불명의 메일 꾸러미들이 실린다
        도시 전체를 실어 보낸 적도 있었다 이 밤엔
        그 사내를 첨부 파일로 전송한다  
        오토바이들이 사이버 거리를 거슬러 폭주(暴走)하고
        빌딩 너머로 색상도 높은 보름달이 뜰 때
        나는 비로소 공(空)디스켓처럼 가벼워진다
        체인점 간판을 뗏목 삼아 저어 가면  
        오늘밤엔 젊은 날의 장자에 닿을지도 모른다
        그도 분명 25時 체인점 앞을 서성이거나
        250cc 오토바이를 남악 형산 너머로 폭주(暴走)하고 있을 것이다
        멀리서 전송된 나비 한 마리 커서 위에 앉아
        깜박깜박 졸고 있다 하루가 슬며시 삭제된다                

                                                      
[감상]
이 시가 새롭게 읽히는 것은 기존 서정(抒情)의 바탕이 되었던 자연의 부산물에서 벗어나 문명화된 도시에서 가치를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기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이런 문명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물을 정면으로 대응하는 시적 발견에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시는 도시의 상징인 25시 체인점과 사이버적인 요소를 적절히 비유하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샐러리맨과 폭주족을 포착해냅니다. 부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소묘해내는 참신한 솜씨도 솜씨이거니와, 슬몃 잇대어 놓은 철학적 사유도 깊이를 더합니다. 하루가 의미없이 삭제되는 날들에게 미안한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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