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딸나무」 / 고현정 / 『시작』2003년 봄호
산딸나무
언제부터 가지만 남아 이곳에 서 있었나
예수가 핏방울 뚝뚝 떨어지는 가시관을 쓰고
골고다의 언덕을 홀로 힘겹게
지고 오르던 단단한 십자가의 나무
그 나무 한 그루가 동네에 가까이 살고 있음을
처음 발견한다 길을 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나무와 겹쳐져 한몸이 될 때
이상하게도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형상이
되는 것이다 남보다 더 빨리 목적지에 닿으려고
두 팔을 많이 흔들며 걸을수록
더욱 더 많이 닮아 있다
해가 넘어 갈 때까지 나무는 키가
작은 사람 큰 사람, 사람들을 가리지 않는다
허리 한 번 구부리지 않고 작은 가지 하나 비틀지 않고
스쳐가는 모든 사람들의 십자가가 되어준다
나도 한 번 두팔을 크게 벌리고
누군가 내 앞에 멈추어 서서 쉬는 사람에게
한 그루 산딸나무로 쑥쑥 크고 싶다
[감상]
이 시는 언덕의 산딸나무와 사람이 겹쳐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종교적 테두리에 가두지 않고, 일상의 풍경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신선하다고 할까요. '스쳐가는 모든 사람들의 십자가가 되어준다'라는 의미만으로도 이 시는 소시민의 삶을 어떻게 따뜻하게 조명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그리 높은 곳에서 살아가는 산동네 사람들에게는, 그 산딸나무로 인하여 희망과 구원이 늘 함께 할 것입니다. 나에게 이 시의 산딸나무는 누구일까 생각하고픈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