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각장 근처> / 장성혜 (2002년 『리토피아』로 등단) / 《리토피아》 2009년 봄호
소각장 근처
달아난다. 화분이, 의자가, 약봉지가, 꽃들이
꽃 같은 약속이, 읽지도 않은 책들에 바통을 넘긴다
숨을 헉헉거리며 허공으로 달아난다
연기가 되어 달아나면서 사라진 얼굴을 갈아입는다
여섯 살 동생이, 할머니가, 나를 버린 남자가
흐물흐물 춤을 추며, 다시 연락하겠다, 낄낄거리며 달아난다
연기가 사라지는 하늘엔 자주 먹구름이 끼고
연기에 취한 집들은 쉬지 않고 쓰레기를 낳고
갈수록 의자가, 꽃들이 한 자루에 들어가는 속도가 빨라진다
쓰레기가 펑펑 솟는, 창가에 앉아 굴뚝은
터질 듯이 불룩한 하루를 피운다
의자를, 화분을, 일회용 꽃들을 뻑뻑 피운다
가끔 달아나고 싶은 사람들도 피운다
필터만 남은 여자 하나 비 내리는 창밖으로 던져버린다
핸들을 잡은 바람은 사라지는 방향을 이리저리 바꾼다
피가 나도록 긁어도 끝나지 않는 가려움이 시작되는 저녁
또 하루가 아토피 걸린 지붕으로 달아나면서
살 속 깊이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감상]
버려진 것들, 그리고 영영 이별한 것들이 모이는 곳이 소각장입니다. 기억이었고 대상이었고 형상이었던 것들이 활활 타오르는 불에 휩싸여 연기로 사라져 갑니다. 이 시는 이러한 소각장에서의 풍경을 생동감 있게 묘사해냅니다. 어쩌면 우리를 떠났다고 생각했던 그것들은 스스로 우리에게서 ‘달아난’ 것이지도 모릅니다. 소각장을 의인화한 기막힌 소묘 ‘쓰레기가 펑펑 솟는, 창가에 앉아 굴뚝은/ 터질 듯이 불룩한 하루를 피운다’ 이 표현 하나 만으로도 이 시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에게, 그리고 그 다이옥신에게 우리는 어떤 끔직한 존재로 기억될지. 쓰레기를 양산하는 일생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