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농장에 대한 추억 / 윤의섭 / 1994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사슴농장에 대한 추억
미루나무 근처에 사슴 농장이 있다고 했는데
조그만 여자애가 나물을 캐고 있을 뿐이다
한아름 남짓한 미루나무 뒤로 사라졌다가
햇살처럼 나무 사이 비집고 나타나는 여자애 따라
꽃 지고 장마 지고 흰 눈 소복이 쌓여 발자국 남은 자리에
다시 꽃 피고 서리 피는 계절이 몇 갈피째 넘어간다
여자애는 땅속에 묻혀 있던 수염뿌리 달린 할아버지
머리를 뽑아 바구니에 담는다
기억에서 잊혀져 이젠 쭈글쭈글한 구근 같은 친구들 머리를
칼로 끊어내어 바구니에 담는다
미루나무를 지나칠 때마다
여자애는 조금씩 자라 늙은 어미가 된다
잊혀진 사람들이 저렇게 모여
내 가난한 식탁에 성찬을 차려주었구나
나물을 다 캔 여자애는 사슴처럼 겅중거리며 사라지고
나는 땅에 박힌 발뿌리 뽑지 못한 채 누군가의 구근이 되어간다.
[감상]
이 풍경에서는 기억을 캐는 여자가 있네요. 땅 속에 길을 내며 굵어 가는 인연들, 이 시는 인생을 통찰해내는 시선이 좋습니다. 또한 화자조차 누군가의 구근이 되어간다는 마무리 또한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우이동에는 사슴농장이 있다던데, 저는 그곳에서 사슴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양손 가득 술병을 들고 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MT만 가물거릴 뿐. 민박집 벽에 낙서했던 추억들만 왕왕히 마음에 고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