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침대』/ 김형술/ 시작 시인선
하수구의 전화기
수건공장 옆 다리 위를 지날 때면 언제나
누군가 자꾸 나를 불러 세우지
이봐 이봐 잠깐만 내게 시간을 좀
검은 목소리 발길을 가로막곤 하지
난 아닐 거야 그렇지? 그래도 내려다보면
하수구 옆 잡풀 속 장미나무 한 그루
검은 물 위에 꽃잎 몇 후두둑 던지고
어디 있니? 대답 좀 해, 잔뜩 쉰 목소리
부탁하곤 하지 제발 한번만
노래를 불러주고 갈 순 없겠니?
그래 그러마 헛기침으로 가슴을 세우지만
안 들려 안 들려 버려진 인형이 훌쩍이고
안 되겠어 아무래도 누군가 내 영혼에
검은 뻘을 가득 채워 놓은 것 같애
괜찮아 요즘이야 아주 쉽게 고장나
망가지면 함부로 버리는 게 가슴인 걸
검은 물 위에 반쯤 고개를 내민 채
자꾸만 말을 거는 수화기 속 막힌 구멍들
이봐 이봐 내게 한번만 귀를 좀 줘봐
그렇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수건공장 옆 하수구 눈에 잘 띄지 않는
잡풀 속에 한참 동안 앉았다 왔어
어둠이 갓 태어난 별들 데려와
시궁창에 가볍게 띄워 놓을 때까지
이봐 이봐 누가 내게 제발 대답 좀……
아무도 아는 척 않는 한길가 어둠 곁
[감상]
시인에게 귀란 어떤 것인가를 배우게 하는 시입니다. 들리지 않는 것들의 외침, 버려진 것들의 하소연을 나는 얼마나 외면하며 지나왔을까. 그것들이 갖고 있는 추억에게 또 얼마나 매정했을까. 그렇게 그 길가 것들이 결국 버려진 것이 아니라 끝끝내 스스로 세상을 버린 것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