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가 날아간 하늘』 / 유춘희 / "시산맥" 동인지, 『천년의 시작』
도둑
경계 안쪽으로 그가
살금살금 기어들어왔다, 성공적으로
문을 따고 깊게 들어와서
두리번거렸다. 주인이
비워놓은 시간에의 완전한 잠입, 일순
날은 어두워졌고 나도
함께 어두워졌다.
내 안의 전부를 그는
만지작거렸다. 보이지 않는 것
숨겨놓은 것들을 들쑤셨다. 취약 부분을
뒤적였고 뒤적이는 곳마다 나는
취약했다. 초범이 아닌 듯 그는 결코
무거운 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백주 대낮 환하디
환한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뒤적이다 가버렸다. 헝클어진
몸에 빨대를 꽂고 밑동까지
들이킨 후 훔쳐낸
젊음을 어깨에 둘러메고 그는
걸어나갔다. 도난당한 한 도막의 시간을
다른 시간들이 쑥덕거렸다.
고통은 깊고 시간은 잠깐이었다. 상처난
바람 하나 열린 문 찌걱찌걱 흔들어주었다.
[감상]
'젊음'을 훔쳐내다니, 어쩌면 이 도둑은 내 안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불안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삶의 취약한 부분을 여지없이 따고 들어와 시간을 빼내버린. 예전에는 청춘을 탕진한 줄만 알았지만 기실, 그런 향유를 즐긴 이는 내 안의 도둑이었던 것. 하여 상처 쪽으로 열려진 창문은 죄다 한숨이었던 것. 그 반대에서 숨을 빨아들이는 이 도둑의 당당한 모습, 거울 속 장물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