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신춘문예당선시집』/ 천수호/ 『문학세계사』
오래된 부채
자불자불 눈꼬리 풀어지게 하는
검은 수실 끝 더듬어
아버지는 머리맡의 낡은 부채를 쥔다
등을 밀고 온 바람, 허파 자루 속에 숨겨놓고
거미줄 숨결 뽑아내는 아버지
부채는 좀처럼 펼쳐지지 않는다
나는 부채를 받아 쥐고 낡은 골을 펼친다
휘어진 부채살이 푸석푸석 헛바람 일으킬 때마다
반쯤 열렸다 감기는 지평선 너머
붉은 목단이 피었다 졌다
기억들 붙잡고 있는 아버지 눈 속으로
나는 붉은 꽃 한 송이 안고 들어간다
애벌레 주름으로 접어넣은 부채처럼
어깨를 깎던 대팻날 바람 잠재우고
이제 관(棺)에 들고 싶은지
아버지는 자꾸 몸을 움츠린다
나는 부채를 바투 쥐고
아버지가 어릴 적 내게 한 것처럼
당신의 몸에 부채질을 한다
바람은 주름진 살갗 속으로 접혀 들어가고
내가 꾸벅 졸음을 참을 즈음
아버지와 같이 걸었던 검은 밤길이 꺾여 돌아가고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하얀 나비 한 마리
아버지의 숨결 끝에 앉았다 날아오른다
[감상]
한 여름 아버지에게 부채를 부쳐드리는 화자의 모습이 선합니다. 곳곳에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生을 애잔하게 투영한 흔적도 볼 수 있고요. 무엇보다도 부채에서 끝나지 않고 끊임없이 진행되는 비유의 세밀한 묘사도 눈 여겨 볼만합니다. 마지막 아버지의 죽음을 암시하는 '하얀 나비'의 상징이 깊은 울림을 주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