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 유홍준/ 『현대시 2002』
喪家에 모인 구두들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들이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망자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패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북천(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감상]
상가집 풍경이 선합니다. 시가 좋은 이유는 상가에서 발견하는 "짓밟는 게 삶"이라는 직관의 것입니다. 詩라는 것, 새로울수록 맛이 더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이미 많은 시인들에 의해서 발굴되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시의 것을 찾아 세상에 시선을 투영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시인의 몫이 아닐까요. 그래서 시집을 많이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미 채굴된 낡은 표현들을 피하려는 데에도 있을 것입니다. 끝끝내 광부의 소임을 잊지 말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