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跡) / 김신용/ 『문학사상』9월호(2002)
적(跡)
벽에 푸르스름한 곰팡이가 피었다
음습하고 그늘진 공간의 <모피외투> 같다
일생을 위해 내가 입었던 허식의 장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밀었던 내 결핍
오늘도 숲 속의 푸른 지의류처럼 돋아나, 나를 덥고 있다
생을 썩이지 않으면 삶이 돋아나지 않았던
그 습기 차고 축축하던 나날들―,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갈증의 미세한 포자를 퍼트려, 먼지처럼, 공기에 섞여
공기처럼 흘러다니다가, 방부제인 햇살 한 올
스며들지 않는 공간을 만나면, 왕성하게 집을 짓는―
숙주를 부패시킴으로써 번식하는, 그 부패가 뿌리이며 꽃인
내 기생(寄生)―, 제 시체 속에 제 자신의 뿌리를 묻는
그 부패의 궤적으로 살아 있다
의식의 벽지, 내장재(內臟材)인 침묵까지도 파먹고 있는
밀렵의 올무 같은,
시간의 마멸성을 닮은―.
[감상]
치열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군요. 곰팡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인상적입니다. 곰팡이가 피는 과정을 우리의 삶의 과정으로 비유하는 솜씨도 좋고요. 하여 저 또한 세월스럽게 부패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