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기 전엔 하나의 기호였다」 / 고현정 / 『현대문학』2001년 4월호 (2001년 문화일보 등단)
내가 읽기 전엔 하나의 기호였다
스무 살 때 나는 기호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였다
길을 가며 수많은 기호들을 만난다
표지판 벽화 신호등 현란한 광고들, 가끔
반구형의 내 왼쪽 뇌에 갸름한 물방울이 인지된다
갸름한 물방울의 기호는 나를 한 곳으로만 떠나게 한다
화살표는 나를 돌고 돌고 돌게 한다
동그라미를 따라 멈추기도 하고 서기도 한다
그러한 기호들이 간혹
분자운동을 시작하기도 한다
벽화에 그려져 있던 기호들에서 색감과 질감 패턴들이
쏟아져나오며 나에게 말을 건다
나는 노랑돔이 되어 기호의 바다에서
체온이 없는 기호들과 섞여 헤엄치고 있다
내가 읽어 주기 전엔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움직이는 그림자들일 뿐이다
갸름한 물방울의 기호에
후후 숨을 불어넣으며 <강>이라고 읽어 본다
허연 모래배를 드러내고 한동안 흐르지 못하고 있던
스무 살 나를 단번에 거꾸러뜨렸던
아무르 강이 넘쳐 출렁이며 우르르 흐르기 시작한다
[감상]
기호에 대한 수리적인 해석이 놀라운 시입니다. 물방울에서 시작되는 거침없는 상상력은 모든 기호의 체계를 지나 거대한 무의식의 협곡을 지나 망각이 퇴적한 삼각주로 넘칩니다. 좋은 시에는 이처럼 끝을 예상할 수 없는 묘미가 있습니다. '내가 읽어 주기 전엔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직관해내기까지 시인은 그 '있다'의 기호에 얼마나 헤맸던 것일까. 스무 살 청춘은 그렇게 그 어떤 기호로도 제 안에 물길을 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