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도에서 푸른 은행나무를 보다」 / 서안나 / 2003년『시와 현장』여름호
지하도에서 푸른 은행나무를 보다
지하도를 올라오다
동냥하는 사내를 본다
손바닥이 온 몸인 사내
사내의 시퍼런 손바닥에 반짝이는 동전 몇 개
자세히 보면 사내의 손은 은행잎을 닮았다
겨울에도 잎을 틔우는 지하도의 은행나무 한 그루
사내는 차가운 계단에 뿌리를 내려
가장 낮게 몸을 낮추어
침묵으로 겨울을 건너고 있다
어쩌면 사내의 몸 속엔
동전 마냥 반짝이는 은행들이
가득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난 지하도에서 푸른 은행나무를 보았다
[감상]
가령 이런 거지요. '손바닥이 온 몸인 사내'. 앵벌이 사내를 단 한 줄로 집약시킬 수 있는 직관입니다. 사실 이러한 발견이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자 우리가 시를 인간의 영혼과 결부시키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사내를 은행나무로 비유함으로서, 홈리스 존재로 내몰려 살아가는 풍경을 서정으로 비유해 냅니다. 직업을 갖고 일하고 싶어하나 받아줄 곳 없는 그의 어려운 현실을 시인은, 꿋꿋하게 무성한 한여름의 은행나무처럼 극복되길 바랬을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참 푸른 희망이 도처에서 자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