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드, 자동판매기 / 이영수/ 1998년 문학동네 하계 당선작
바코드, 자동판매기
녹슨 쇠 눈꺼풀을
잡아당겨 깡통 속으로 사라진다
(섬뜩한 갑옷을 입고/ 몇 세기를/ 미칠 듯 기다리면서)
판매 중지된 물의 기억은 깡통이다
판매 중지된 옹달샘의 기억도 깡통이다
버려지는 구겨짐도 깡통이다
벽 깊숙이 플러그를 꽂고
물의 기억을 저장시키고 있는
꼬리 긴 물의 집도 딱딱한 사각의 깡통이다
두드려도 열릴 줄 모른다
골수 깊숙이 빨대를 꽂아
부서진 별들을 빨아먹은
옹달샘이 벽 속을 굴러간다
발길로 툭 찬다
진공의 샘이 운다
양철 손수건이 붉게 젖고 누군가
달 빠져죽은 깡통을 항문에서
척 건네준다
[감상]
상상력이 가져다주는 선물이란, 일상의 것에서 다른 세계를 본다는 것이겠지요. 이 시는 자판기이거나 그 안 깡통이거나한 일상적인 코드를, 공감할 수 있는 낯선 경지의 플러그에 꽂아 넣습니다. 깡통 마개를 열었을 때 거품으로 빠져나오는 탄산음료를 "샘"으로 비유한 것도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