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묵음의(默音) 나날들 - 은 빈

2003.02.12 11:55

윤성택 조회 수:964 추천:158

「묵음의(默音) 나날들」/ 은 빈/ 『시와사상』 2002년 겨울호


   묵음의(默音) 나날들


  출구가 없는 밤이 갇혀 있다. 다세대 주택 삼층 옥탑방에서 여자가 활자의
숲을 서성이고 있다. 길게 자란 풀섶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뛰쳐나온다.  활
자의 숲을 헤쳐 나가던 여자가 <구직란> 앞에 물음표처럼 멈춰선다. <나라
홈쇼핑>을 지나  <영재두뇌 학습지>를 지나  <맑은샘물 정수기>에서 여자
가 머뭇거린다. 아까부터 목이 말랐는지 여자가 <행복마트> 안으로 들어가
이온음료를 하나 사들고 온다. 타는 듯한  목을 축이며 자신의 키보다  훌쩍
커버린 벽을 바라본다. 조금의 틈새도 보이지 않는 벽.  여자가 무거운 걸음
으로 활자의 숲을 빠져나온다. 언제부턴가 그녀의 몸을 조이기 시작한 시간
들. 가끔 여자의 옥탑방에는 활자의 숲에서 만난  고양이가 찾아오고,  다닥
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의 난간을 날렵하게 건너다닌다.  세상 속으로 한 발
도 내딛을 수 없는 그녀. 누구와도 함께 흐르지 못한 생을 끌어안고, 여자가
어둠의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  고층 아파트에 걸린 별들이  그녀의 옥탑방
으로 쏟아지지 못하고 주루룩 흘러내린다.



[감상]
옥탑방에서 구직란을 읽는 그녀, 그리고 갇힌 그녀와 대별되는 날렵하게 이리저리 쏘아 다니는 고양이, 이 모든 것이 '밤'과 활자의 '숲'을 축으로 풍경이 소묘되어 집니다. 이 시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통해, 나와 닮은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공감한다는 것. 아마도 그게 '울림'의 기본적 요소겠지요. 현대문학 9월호, '가벼운 소멸을 위하여'에 이어 좋은 시를 꾸준히 쓰는 시인으로 기억되네요.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71 바코드, 자동판매기 - 이영수 2002.05.21 1000 178
70 해바라기 - 신현정 2009.11.13 999 118
69 바닷가 사진관 - 서동인 2003.11.01 999 183
68 사유하는 텔레비전 - 우대식 2004.01.05 993 210
67 폭주족의 고백 - 장승진 [1] 2009.02.12 992 111
66 만리동 미용실 - 김윤희 2003.05.20 990 164
65 한천로 4블럭 - 김성수 2003.03.05 988 202
64 내외 - 윤성학 2003.06.23 985 169
63 바람분교 - 한승태 2002.12.04 984 179
62 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 - 김사인 2003.02.05 983 169
61 개심사 거울못 - 손정순 2002.11.04 978 170
60 피라미와 피라미드 - 이승하 2003.07.07 977 196
59 늙은 정미소 앞을 지나며 - 안도현 2003.04.21 976 155
58 철자법 - 문인수 2003.05.15 972 166
57 낙마 메시지 - 김다비 2003.06.09 970 176
» 묵음의(默音) 나날들 - 은 빈 2003.02.12 964 158
55 낯선 길에서 민박에 들다 - 염창권 2003.05.16 962 161
54 산란 - 정용기 2003.08.01 961 167
53 밤 막차는 왜 동쪽으로 달리는가 - 김추인 2003.10.21 958 156
52 불찰에 관한 어떤 기록 - 여태천 2003.07.01 955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