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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길에서 민박에 들다 - 염창권

2003.05.16 11:39

윤성택 조회 수:962 추천:161

『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 / 염창권 / 2001 <시와시학>  



        낯선 길에서 민박에 들다


        길은 곧장 이어져 산을 넘을 듯했으나
        관리사무소 앞에서 멈추어버렸다
        사람들은 서둘러 현관 앞까지 포장을 끝내고
        그리운 집에 들고 싶어했을 것이다
        밤새 서로의 살갗을 쓰다듬으며
        무슨 표시라도 남겨두었던 것일까
        결국 사람들은 타인의 몸에서 빠져나온 뒤로
        다시 그곳을 기웃거리며 길을 이어가는 것이다
        나는 추억을 이야기하기보다 내 피부 속에
        감추어둔 쓸쓸함을 끌고 다니기에도 지쳤다
        그러나, 부패한 나날들의 추억은
        풍선처럼 자꾸 부풀어 오르려고만 하는 것이다
        이제 내 피부는 헐렁하게 늘어난 가죽 자루여서
        지상의 고양이들조차 방문하지 않는다
        하늘에는 구겨진 이부자리를 편 것 같은
        검은 구름이 주저앉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나뭇잎은 바람에 날리지도 않고
        곧장 떨어져내려 착 착着着 소리를 낸다
        나뭇잎들은 나처럼 이미 길을 잘못 든 것이다
        그들은 길에 붙들려 이리저리 밀려다니다
        진부한 추억의 바퀴에 깔려 부서져버릴 것이다
        산을 넘고자 망설이는 것은 내 외로움의 증거이나
        무거운 구름이 내 머리 위를 떠나지 않고
        억누르는 힘을 견딜 수가 없다
        내 마음은 이미 누추한 저 이불이라도 덮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느릿하게 하품을 하며
        낯선 길 위에서 민박에 드는 것이다



[감상]
혼자서 여행을 떠나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이 여행에서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부터 '고독'이라는 동행이 생깁니다. 이 시는 어느 민박집에 들며 느끼는 감정을 쓸쓸한 풍경들과 함께 보여줍니다. 늘 떠날 것을 대비하는 나그네에게 이불을 덮는다는 행위는 그야말로 안주(安住)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화자에게 '이불'은 각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누추한 이불'이 품어주었던 길의 사람들, 그들의 살비듬과 그들의 땀, 그들의 사랑…, '민박집'이라고 발음하면 그리움이 떠오르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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