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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동 미용실 - 김윤희

2003.05.20 12:02

윤성택 조회 수:990 추천:164

「만리동 미용실」 / 김윤희 / 2003 포엠큐 사이버신춘문예 당선작 中  



        만리동 미용실


        한 집이 멀다하고 점집이 늘어선 만리동 고개,
        한 자리서 삼십 년을 버텨온 그녀의 집이 있다
        길게 놓인 선반 위 내력처럼 감겨진 화초의 덩굴손이
        거북이가 들어있는 조악한 어항을 쓰다듬고 있다
        가끔씩 버둥대는 물 위로 부유물이 둥둥 떠오르지만
        생뚱맞게 느린 졸음만 꿈벅댄다
        엊저녁 늦은 손님이 버리고 간 짚북데기 같은 머리카락,  
        백색 반죽이 덕지덕지 붙은 보와 코롬한 냄새 배인 타월이 흩어져 있다
        한 때, 번득이는 가위 날을 타고
        지난날을 뭉덩 잘라내기도 하고, 솎아주기도 했다
        귀기어린 춤사위로 펴거나 감아 올려보기도 했지만,
        부부부 떠는 중화기 거품처럼 이제,
        그녀의 신점도 두루뭉술해졌다
        얼마나 많은 희망이 점괘로 늙어갔을까
        원형가르마 같이 퍼진 그녀
        허리 펴고 거울 속
        낯익은 여자의 머리를 매만진다
        창밖 어디론가 수신 중인 점집 깃발들
        그녀의 머리핀처럼 꽂혀 있다



[감상]
점집이 많은 만리동 고갯길 어느 미용실의 풍경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생생한 묘사로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나른합니다. 30년이라는 세월동안 미용실 안에서 살아왔을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탈모증'이다라는 것. 남의 머리를 매만지던 그녀가 결국 자신의 머리를 감당할 수 없다는 슬픈 설정은 의미가 깊습니다. 또한 살아온 공간의 점집 깃발을 그녀의 '머리핀'으로 내다보는 직관 또한 미시적 풍경에서 의식을 확장시켜 주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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