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찰에 관한 어떤 기록」/ 여태천 / 『문학사상』2003년 7월호
불찰에 관한 어떤 기록
1
지하의 정거장들은 알 수 없는 노선을 따라
순식간에 피었다 졌다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색은 길을 알려주었다
모든 노선이 색으로 정의된다는 사실을 처음 배운 것이다
레드, 화이트, 블루
열로우, 모든 색은 아주 옛날부터 방향이 정해져 있었다
허리에 두른 색을 보고 사람들을 사귀었고
같은 띠만 두르면 안심했다
녹색 의자가 집까지 바래다주었을 때
그것은 패스카드였다
2
걷기가 어려울 때마다 노선이 만들어지고
길은 오래된 색의 허물을 벗고
새 몸을 얻었다
길의 변신은 무죄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시간에 쫓기거나 급할 때마다 모두들 색만 보고 뛰었다
색에 따라 노선도 바뀜을 모르지 않았으나
다다익선을 배운 건 집을 한참이나 지나친 뒤의 일이었다
어느 날 갈아타는 곳이 사라졌다
종착역이었다
아버지가 그랬다 그는 잘못 든 길을 끝까지 갔다
그러다 몸도 집도 다 잃었다
종착역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3
지금, 지하의 바깥으로 비가 내린다
젖은 나뭇잎들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떨어지고
나뭇잎 보이지 않는다
비에 가려 사람들 보이지 않는다
정전의 순간에
모든 노선의 바깥이 어둠임을 배웠다
줄서지 않고 갈 수 있는
거기엔 아직 노선이 없다
[감상]
지하철 노선과 역들, 그리고 종착역에 관해 독특한 시선으로 풀어낸 시입니다. 특히 2의 끝부분 '아버지'를 연결시키는 직관이 좋습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함으로써 저지른 잘못 즉, 불찰을 '시 쓰는 일도, 살아가는 일도, 모든 것이 다 제 불찰입니다'라고 말하는 시작메모도 인상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