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란」/ 정용기/ 『현대시』2003년 8월호
산란
혼인 비행을 끝낸 잠자리들
떼를 지어 냇물에 알을 낳는다
먹물 적시는 붓처럼 꽁무니를 퐁당거린다
물 속의 푸른 하늘에 온몸으로 경전을 새기고 있다
유서를 쓰고 있다
부디부디 살아서 돌아오너라
알과 애벌레와 탈바꿈의 머나먼 시간을 지나
길 잃지 말고 반드시 살아 돌아오너라
그래서 그 머나먼 여정의 스산함과
갈랫길마다 서성거리고 구부러지던 마음을
날개가 투명하게 기억하게 하라
저 붓질이 가르치는 머나먼 길
잠자리들이 온몸으로 꾹꾹 눌러쓰는 전서체의 유서를 읽으며
깊은 가을을 건넌다
[감상]
잠자리가 산란하는 모양을 '온몸으로 경전을 새기고' 있다니요! 무릎 한번 쳤습니다. 정말 새로울 것이 없는 세상에서 이런 발견을 보면, 詩가 왠지 키가 커 보입니다. 참 좋은 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