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포늪 왁새』 / 배한봉 /『시와시학사』시인선
빗방울 화석
나는 지금 1억 년 전의 사서(史書)를 읽고 있다
빗방울은 대지에 스며들 뿐만 아니라
물 속에 북두칠성을 박아놓고 우주의 거리를 잰다
신호처럼 일제히 귀뚜리의 푸른 송신이 그치고
들국 몇 송이 나즉한 바람에 휘어질 때
세상의 젖이 되었던 비는, 마지막 몇 방울의 힘으로
돌 속에 들어가 긴 잠을 청했으리라
구름 이전, 미세한 수증기로 태어나기 전의 블랙홀처럼
시간은 그리움과 기다림을 새긴 화석이 되었으리라
나는 지금 시(詩)의 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1억 년 전의 생명선(線) 빗방울을 만난다
사서(史書)에 새겨진 원시적 우주의 별자리를 읽는다
[감상]
화석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안 무늬보다 암석 밖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하는 궁금증이 앞섭니다. 태양이 뜨고 지며, 숲이 생겼다가 없어지고, 비가 내렸다가 눈이 내렸다가 1억년 동안 반복되는 순환들. 그 엄청난 시간의 내력이 화석에 새겨져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경외감이 듭니다. 이 시는 빗방울 화석의 생성 근원을 쫓으며 우주적인 영역으로 시적 상상력을 열어 놓습니다. 그리하여 활자가 아니라 제 온몸으로 기록이 되는 화석을 통해 "그리움과 기다림"을 보여줍니다. 아직도 발견되지 못한 땅 속 누군가 읽어주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화석처럼, 저 밤하늘의 수많은 별자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