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강습소」 / 박서영 / 95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죽음의 강습소
오전 여덟 시 상가를 지나친다
동네 입구의 전봇대에는 하얀 종이에
반듯하게 씌어진 喪家-->가 붙어 있다
이 길로 가면 상가로 갈 수 있다
나는 지금 문상 가는 중이 아니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이 표식을 따라왔다
울면서도 왔고 졸면서도 왔다
사랑하면서도 왔고 아프면서도 왔다
와보니 또 가야하고 하염없이 가야하고
문상가는 줄도 모르고 나는 문상 간다
죽어서도 계속 되는 삶이 무덤 속에 누워
이 세상이 난리도 아니라며 또 꺼억꺼억 운다
울다가 가만히 죽은 듯 누워있는 시체들
여자들은 죽음의 강습소에서 과도를 꺼낸다
여자들이 흘리는 눈물을 따먹으며 세월이 간다
동그란 눈물에 과도를 꽂는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과즙의 맛
죽음의 강습소 같은
죽음의 예배당 같은
이 도시의 하늘이 뻥 뚫려 있구나
허공에 흩어진 시간의 표식을 따라가던 어떤 날은
가령 오늘 같은 오전 여덟 시 도시는
영정사진처럼 검은 띠를 두르고
묘비 같은 십자가를 바싹 세우고 있다
그 아래 납작 엎드린 채 살아간다
그런데 무엇이 내 몸을 자꾸 찌르는거야
나를 들어올리는 거야
묵직한 관 하나가 내려오는 아파트를
나는 그냥 지나친다
[감상]
어느 골목에 접어들면 전신주에 이런 표식이 붙어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 시는 그런 일상사에서 삶과 죽음을 발견하는 시선이 참신합니다. 특히 문상에서 더 나아가 길을 '울면서도 왔고 졸면서도 왔다/ 사랑하면서도 왔고 아프면서도 왔다'라는 직관이 인상적이라 오래 울림이 남습니다. 현실과 밀착시킨 초반부를 지나 중반부에 이르면 상상력은 나름대로 시의 균형을 유지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군요. 도시화되어 가는 삶 속에서 자아 발견하기. 우리가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므로 더더욱 눈이 솔깃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