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궁에서 놀다」/ 박진성/ 『현대문학』 2003년 2월호
수궁에서 놀다
할머니가 죽었다… 육십 년 전 洪水로 大平里 들이 물에 잠기고
신작로 사거리 방앗간에서 고추를 빻으셨다 천 마지기라던가 논이
순식간에 몹쓸 땅으로 변하고 할아버지의 늦은 귀가, 할머니 물빛
손이 싸전 공터로 금강의 물을 끌어왔다
오일장 끝나는 해거름에 당신은 자그마한 내 것을 씻고 또 씻으
셨다 붉은 다라이 안에서 나는 물고기였다 할아버지가 다라이 통
째로 엎었을 때, 나는 금강으로 나아갔다 할머니 물빛 주름이 내
몸에 찍혔다
수초 같은 나무들 사이로 할머니 작은 텃밭, 그곳에서 나는 자
랐다 옥수수와 붉은 고추에게서 고요를 배웠다 열매를 밀어내는
식물 뿌리보다 더 깊은 강이 어디 있는가
할머니가 죽었다… 폐를 자르고 입을 막고 아가미로 숨을 쉬겠
다 애초부터 나는 물고기였으니 저녁이여,강이 나를 가두면 흰 고
무신 속에다 水宮을 지으리니 나는 할머니가 放生한 물고기였으
니
[감상]
강물, 가족, 수몰지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처럼 좁다고 생각되면서도, 비슷한 경험에 의한 혹은 비슷한 연상작용에 의한 감성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바로 밑 장만호 시인의 시와 닮아 있지만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리, 남강댐이 들어서면서 수몰된 유년을 불러내는 주술적인 흐름이 내내 인상에 남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放生한 물고기였으니'의 여운이 깊습니다. 한때 젊은 시인들이 기형도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말, 그 번역투의 시를 배운 끄나풀 중에 나도 속해 있을까. 닮아서 싫고 닮지 않아서 불만인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