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와르론(論)」/ 박수서/ 『다층』2001년 겨울호
누와르론
단지 어둡다고
단지 우울하다고
그 여자, 삶 전체가 누와르라고 깨진 소주병처럼
베일 듯이 윙윙거리네.
도살장에서 목이 따여 뜨거운 한드럼의 선지를 토해내는
돼지를 보고,
제왕절개로 희연 뱃가죽을 째고 태어난
핏덩이 아이를 보고,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니?
피는 피고
아픔은 아픔인 거야.
내 말이 너무 단정적이니?
우, 우울해 하지마.
너의 코드로 텃새처럼 앉았다 가는 그 남자 있잖아
험프리 보가트 ……… 바바리코트 깃을 올리며 정말 누와르적으로
미궁에 빠진 너의 우울을 수사하는 총잡이가
오늘은 무슨 단서라도 찾았을 줄 아니.
나는 너의 낡고 긴 누와르 필름에 감겨
도무지 투영(投映)되지 않아
휴관중이야.
[감상]
소위 느와루필름이라고 명명된 영화들은 대개가 싸늘한 냉소나 어둡고 고독한 그림자가 깃들여 있습니다. 그런 영화의 태생을 현대 사회의 비인간적인 환경 때문이라고 보는 이도 있고요. 이 시는 그런 영화의 분위기를 전면으로 내놓고, 그 안에 '그 여자'를 등장시켰군요. 대화만으로도 충분한 울림을 줄 수 있다는 힘이 느껴집니다. 마치 시 속의 남녀 곁에 턱 괴고 앉아 속삭이는 대화를 지켜보는 듯한, 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