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 김수우 / 『시와시학』시인선
뿔에 대한 우울
연필 깎아 필통 속에 나란히 세우고
닳은 지우개 하나 넣는다
내일 모레 글피를 그렇게 준비하던 아홉 살
쓸 것도 지울 것도 많으리란 걸 알았을까
연필 끝에서 돋아나던 바람의 이름들
내 몸 속에 뿔 하나 가지고 싶었는지 몰라
연필심 뾰족하게 갈던 정갈한 슬픔
하루에도 몇 번씩 부러지는 연필심
하루에도 몇 번씩 촉을 세우던
오롯한 자만은 한 그루 미루나무로 자랐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미루나무에 파도치던 꿈의 등비늘들
쓰레기통 뒤지는 도심의 들고양이처럼
살아내라 살아내라 살아내라
손톱만 길어나고, 발톱만 길어나고
툭, 무릎 위로 떨어지는 이름 하나
몽당 연필 하나, 잃어버린 뿔 하나
[감상]
어렸을 적 뾰족이 연필을 깎아 넣은 필통을 볼 때마다 왜 그리 든든했던지요. 이 시는 그런 유년의 편린을 섬세하게 풀어놓았습니다. 어쩌면 그 시절부터 써 내려갔던 문장은 아직도 완성이 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연에서 환기되는 잃어버린 추억이 인상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