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마네킹」/ 박설희 / 『실천문학』2003년 가을호 신인상 당선작 中
다리 마네킹
전철역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잡화점
사람들의 머리 위에 걸린 마네킹 다리 대여섯 개
진열대 위에는 위로 쭉 뻗은 발 끝에 모자를 걸고
강력 스타킹 한 켤레 오천 원
지하철이 구내로 진입할 때마다
강력한 그물에 걸린 다리들이
파닥거리며 빙빙 돈다
원 스텝, 투 스텝,
날렵한 발끝을 모으고
허공의 한 지점을 찍으며
발 끝에 얹힌 모자가 빙그르르
인어공주의 후예들이
혀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다리
다리가 말을 한다
다리가 밥을 번다
다리가 신랑을 구한다
낮도 밤도 아닌 때에
입지도 벗지도 말고
타지도 걷지도 말고 오라는 당신의 말대로
나는 그물을 걸치고 가겠다
먼동이 트기 전, 수밀도의 내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푸드덕거리며
저 진주의 성을 향하여
갈고리에 매달린 다리들
밤이 깊어지면 한곳에 모여 쓰러지리
그물 사이로 내비치는 힘줄을 쓰다듬으며
[감상]
지하철을 타러 가다보면 어김없이 보게되는 풍경입니다. 이 시는 쉽게 지나치는 일상을 시로 포착하여 풀어내는 솜씨가 탁월합니다. 특히 마네킹 스타킹이 지하철이 지나는 진동으로 가늘게 흔들리는 모양을 '원 스텝, 투 스텝,/ 날렵한 발끝을 모으고/ 허공의 한 지점을 찍으며/ 발 끝에 얹힌 모자가 빙그르르'로 이어지는 상상력이 신선하네요. 돌아보면 죄다 시로 어른거리는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