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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 방직공장의 소녀들 - 이기인

2001.04.24 10:40

윤성택 조회 수:1667 추천:331

2000경향신춘당선작/ 이기인/ 문학세계사


ㅎ 방직공장의 소녀들



목화송이처럼 눈은 내리고
ㅎ 방직공장의 어린 소녀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따뜻한 분식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제 가슴에 실밥
묻은 줄 모르고,
공장의 긴 담벽과 가로수는 빈 화장품 그릇처럼
은은한 향기의 그녀들을 따라오라 하였네
걸음을 멈추고
작은 눈
뭉치를 하나 만들었을 뿐인데,
묻지도 않은 고향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늘어놓으면서 어느덧
뚱뚱한 눈사람이 하나 생겨나서

어린 손목을 붙잡아버렸네
그녀가 난생 처음 박아 준 눈사람의 웃음은 더 없이
행복해 보였네

어둠과 소녀들이 교차하는 시간, 눈꺼풀이 내려왔네

ㅎ 방직공장의 피곤한 소녀들에게
영원한 메뉴는 사랑이 아닐까,
라면 혹은 김밥을 주문한 분식집에서
생산라인의 한 소녀는 봉숭아 물든 손을 싹싹 비벼대네
오늘도 나무젓가락을 쪼개어 소년에 대한
소녀의 사랑을 점치고 싶어하네
뜨거운 국물에 나무젓가락이 둥둥
떠서, 흘러가고 소녀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고 분식집 뻐꾸기가 울었네

입김을 불고 있는 ㅎ 방직공장의 굴뚝이,
건강한 남자의 그것처럼 보였네

소녀들이 마지막 戰線(전선)으로 총총 걸어가며 휘파람을 불었네




[감상]

비록 어렵고 힘들더라도 건강한 삶들은 아름답습니다. 이 시 "ㅎ 방직공장 소녀들"은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탁월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빛을 찾아내는 것, 자기 감상성에 매몰되기보다는 한번쯤은 생각해볼 대목입니다. 특히 "입김을 불고 있는 ㅎ 방직공장의 굴뚝이,/ 건강한 남자의 그것처럼 보였네" 부분이 외설적이지 않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은 건강한 정신에 깃든 풍경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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