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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노동자의 일기 - 이윤택

2001.04.26 11:32

윤성택 조회 수:1661 추천:321

춤꾼이야기/ 이윤택/ 민음사


펜 노동자의 일기

                

          5시까지 은행에 닿기 위하여 빠른 걸음으로 지
        하철 정거장으로 내려갔다. 남은 동전으로 석간을
        샀다. 오늘밤은 티파니에서 아침을 볼 것이다. 왼
        쪽 가슴에 손을 얹고 속주머니께를 가만히 눌러
        본다. 여기 VIP 한 장이 계시다. 10분 후 세종대
        왕으로 등극할 분이다. 대왕은 은혜로우시다. 내
        가 쓴 대본보다 민중지향적이다. 나는 오늘 우리        
        들 일그러진 청춘을 팔았다. 맞아, 80년대는 전투
        적 여성이 등장할 때지. 이제 슬픈 엘레지는 고물
        상에나 가라구. 연출가는 기분좋게 선금 50만원정
        을 지불했다. 나는 당분간 예금구좌를 갖게 될 것
        이다. 지난 일 주일 내내 라면봉지를 뜯으며 김이
        무럭나는 불갈비 백반을 꿈꾸었다. 나에게 밥사줄
        인간이 없다는 느낌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건
        정말이다. 찬장에는 정어리 한 토막 없고 바퀴벌
        레까지 식욕을 돋우는 시각 나는 필사적이 된다.        
        위대한 굶주림의 힘, 농경시대에는 땅 파먹고 살
        고 싶은 자들이 글을 썼다. 그들은 예언을 꿈꾼
        다. 밥을 위하여 글쓰지 않는다. 그럼,작위를 위
        하여? 파먹을 땅이 없다. 빈손뿐이다. 노동조
        합장은 엄청나게 굵고 단단한 내 집게손가락을
        보면 감동 받을 것이다. 내 식욕은 세종대왕 수염
        보다 억세다. 대왕은 소비할 줄만 안다. 내 식욕
        은 수요와 공급을 창출하는 균형감각이다. 그래서
        나는 대왕을 사랑하면서 간단하게 배반하기도 한
        다. 대왕을 차버리기는 철지난 애인보다 쉽다.



[감상]
이윤택은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중경남고를 졸업한 후 드라마센터서울연극학교에서 연극수업 중 도중하차, 부산에서 소극장을 운영하다 패가망신, 그 후 우체국직원, 한일합섬 기사, 한전 사원 등 전전하며 독학, 방송통신 대 총교육과 졸, 제1회 방통문학상 시부문 당선 계기로 「현대시학」을 통해 시를 쓰기 시작, 시집『시민』을 내었고, 지금은 연출계의 대부가 되었답니다.
글을 써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가난한 작가의 이야기가 진솔합니다. 본인은 필사적으로 글을 써서 세종대왕이 찍혀있는 만 원짜리를 얻게 되지만 그것은 절대로 밥을 위하여 글을 쓰지 않는다는 신념을 피력한 것도 보입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게 돈인가요? 너무 돈 앞에 비굴하게 굴지 말아야 되는데요. 그 놈한테 밀리지 말아야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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