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이문재 / 민음사
길에 관한 독서
1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
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다 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 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여간해서 기쁘지 않다
[감상]
그 친구는 숨막히는 아버지와의 단절을 삶에서 각인했습니다. 아버지는 중풍이었고, 가족은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이었습니다. 휴일 대낮 공원에서 그 친구는 깡소주에 새우깡을 먹자고 했습니다. 나는 머뭇거렸습니다. 그가 쓰는 시는 모두 콘크리트, 시멘트뿐이었습니다. 낮술에 취하자 그는 내가 읽고 있던 이 시집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너덜거리는 이 시집이 그의 가방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콘크리트가 도배된 그의 시가 대학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길을 가듯, 훌쩍 군대에 갔습니다. 지금은 인연의 끊긴 다리를 건넜던 것일까요. 길은 언제나 문을 만듭니다.